우리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경찰공무원의 이미지와는 정말 거리가 먼 분입니다. 지금 보면 진로지도를 잘못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일부에는 경찰공무원은 과외 수입이 많았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세상과는 1도 상관없는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생 승진도 인사이동도 포기한 채 시골경찰서의 통신 분야 내근을 근무하셨고 온전히 박봉만으로 살아가려니 늘 빠듯한 살림살이였습니다.
그런 아버지도 부자 인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딸부자, 감정부자, 자식사랑 부자!
우리 아버지는 그 시절 보통의 아버지들과는 정말 다른 분이셨습니다.
저와 우리 동생들을 부를 때 늘 그랬습니다. “예삐야~”
술이라도 한잔 드시고 오는 날이면 우리에게는 축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는 우리를 위한 간식이 반드시 들려 있습니다.
단팥빵, 튀긴 통닭, 맛난 과자. 게다가 술이 취하신 아빠는 꼭 간식으로 라면을 드셨는데 그럼 우린 또 그 짭조리 하고 맛난 라면을 함께 먹을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아버지의 지갑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는 우리를 쭉 둘러 세우고 지폐를 꺼내 용돈을 줍니다.
그럼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물론 엄마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엄마의 잔소리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방학이면 의례히 늦잠을 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또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가시나들이 게으르게 빨리 안 일어나나? 사람 힘들게 밥 두 번 차리게 하지 말고.”
그럼 아버지가 그러시죠.
“아니다. 더 자라.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밥도 먹고 싶을 때 먹어라.”
그럼 엄마는 항상 아버지가 우리 버릇을 더럽게 들인다고 말다툼을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버지가 항상 감사했지만요. ㅎ
우리 아버지의 자식사랑 최고봉은 태풍이 오는 날에 이루어집니다. 1년 중 정기적으로 오는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걸어서 등교하는 우리는 옷과 가방이 다 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센 강풍으로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그 옛날 택시를 부릅니다. 그리고 저희들에게 비닐 우비를 입히고 학교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하십니다.
그래서 제 기억에 태풍 오는 날은 오히려 호사를 하는 날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 집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콜택시를 불러 아이들 등교를 시키다니요. 요즘 부모님들도 그러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들을 보면 우리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지는 다 설명이 됩니다.
아버지는 출근하기 전에 항상 자고 있는 우리 머리맡에 500원 동전을 두고 나가셨습니다.
2명이 자고 있으면 2개 3명이면 3개, 나와 여동생 2명은 늘 그 동전으로 맛있는 과자를 사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늘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먹고 싶은 것은 다 사 주께. 돈 생각하지 말고 사 먹어라. 그러고 갖고 싶은 것도 다 사 줄 테니 절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그냥 가져 오지는 마라.”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교육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아이들에게 늘 조금은 넉넉한 경제 환경을 제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주말이면 결혼식 축의금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그 심부름의 즐거움은 답례로 받는 1만원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우리 여동생들은 그 돈으로 늘 피자, 치킨 등을 사 먹으며 주말이 돌아오길 기다리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감사와 축복이 대부분입니다. 약간의 왜곡이 있겠지만 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은 채 10손가락도 안 됩니다. 늘 다정하고 감사하고 무한애정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시니 조금이라도 무서운 얼굴이 되면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라는 내내 정말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아버지가 즐거워 할 일이면 최선을 다했습니다. 참 현명한 분입니다. 화내고 갈등하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교육방법을 실현 하신 분이니까요.
다만 제가 부모가 되어 살아보니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시던 아버지도 나이가 드시니 힘도 빠지고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받은 것에 비해 자식은 늘 참 부족합니다. 내 자신과 가정이 먼저이고 마음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인 효도를 하는 것 같아 늘 송구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진심 딸 바보였던 우리 아버지! 그런 분의 딸로 태어난 것부터 제 인생은 행운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삶을 더 경험할수록 현재 제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딸이라 가능했다는 것을 점점 더 진하게 느낍니다. 엄마의 뇌졸중 이후 아버지는 더 없이 수척해지고 늙어 버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어제 막내 여동생과 이야기하다 짙은 추억의 따듯함이 올라옵니다.
“너, 어릴 때 아빠가 우리 자고 있으면 두고 나갔던 500원 기억나니?” “응, 기억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놓아두었던 머리맡 500원처럼 지금 제가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원래 부모 자식은 정확한 계산이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그래도 조금은 드리고 싶은데 참 드릴 게 없습니다. 다음 주말은 혼자 있을 아버지를 위해 시골집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더없이 환한 미소로 맛있는 식사 한 끼 해야겠습니다. 부모는 그것이 세상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저도 부모가 되며 배웠거든요.
“아버지 감사해요.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영희는 진짜 행복했어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