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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의 혈관에서 빠져나온 선홍색 피가 취객의 갈팡질팡하는 걸음걸이처럼,
또는 춤꾼의 우아한 발놀림처럼 기묘한 선을 그리면서 비어있던 튜브를 빨갛게 채워나갔다.
채혈을 마친 그레이스는 으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는
에밀리의 작업용 선실에 모인 사람들을 여봐란 듯 돌아봤다.
에밀리에게서 채혈하는 법을 배운 이후로도 한참이나 어설프던 그레이스의 채혈 솜씨가
에밀리에게서 배우자마자 야무지게 피를 뽑던 버지니아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나아진 건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레이스는 채혈한 피가 담긴 튜브의 바코드를 스캔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했고,
그 과정을 꼼꼼히 감독한 에밀리는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 했다”고 칭찬했다.
이후 그레이스와 버지니아는 에밀리의 감독 아래 서로의 팔에서 피를 뽑으며 앞서 했던 절차를 반복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이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우주정거장으로 복귀할 때도, 그러니까 에밀리가 없을 때도
별 문제없이 서로의 팔에서 피를 뽑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
이사칠 일행은 지구에서도, 우주에 온 이후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채혈을 해왔다.
그 피는 우주 환경이 인간의 몸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주는지 알아보는 많은 연구에 활용될 터였다.
그중에서도 에밀리가 특히 주력하는 연구는 달이 여성의 생리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거였다.
달의 공전주기와 여성의 생리주기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인류 문명의 태동기 때부터 있어왔다.
바닷물이 달의 중력 변화에 따라 밀물과 썰물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여성의 신체도 달의 중력 변화에 반응하면서
생리주기도 그에 맞춰진다는 게 여러 문명에서 진리처럼 통용된 통설이다.
달의 주기에 짝짓기나 산란시기가 맞춰지는 경향은 다른 생물에서도 확인된다.
연구 결과 많은 철새와 물고기, 식물이
보름달이 뜨고 바닷물이 차오르는 날 번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관찰됐다.
그런데 달의 주기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와 달 사이의 거리가 여성의 생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여태껏 이뤄진 적이 없었다.
우주에 간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적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주정거장을 떠나 루나 게이트웨이로 이동한 여성 우주인은 그보다 훨씬 더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밀리와 이사칠이 보기에 그렇게 된 제일 큰 요인은
여성의 생리현상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무관심이었다.
에밀리는 여성의 생리와 임신이야말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우주를 개척하려 할 때 제일 먼저, 제일 깊이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MS 프로젝트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이렇게 채혈을 하게 됐다.
연구 대상자가 에밀리 자신을 비롯한 여성 세 명에 불과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 분야에 초석을 놓으면
이후로 심도 깊은 연구가 더 많이 이뤄지면서 유용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이제 그만 자자. 내일은 짐 싸느라 정신없을 거야.”
에밀리가 혈액 튜브의 등록을 마무리하자 이사칠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비를 점검하고 제자리에 챙겨 넣는 것으로 작업을 마무리한 에밀리가 거들었다.
“두 사람은 필요 없는 짐은 싸지 말고 놔두고 가. 며칠 있으면 돌아올 거잖아.”
“귀찮아.”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보낼 며칠간 생활하는 데 필요한 짐만 챙기면 되는데도
그레이스가 귀찮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따지고 보면 이사칠과 에밀리도 쌀 짐이 얼마 되지 않았다.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화성까지 여정과 화성에 착륙한 이후에 필요한 두 사람의 짐을 담은
특대형 트렁크 네 개는 우주정거장에서 루나 게이트웨이로 떠나는 우주선에 이미 실려 있었다.
이사하려고 짐을 싸보면 평소에는 모르던 걸 깨닫게 된다.
평범한 삶을 영위할 때에도 얼마나 많은 짐이 필요한가 하는 깨달음.
생활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늘어나는 짐이 정말로 많다는 깨달음.
사람들은 처음에는 단출했던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거처를 옮길 때가 되면
놀랄 만큼 버거운 규모로 불어나있다는 걸 깨닫고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
그런데 우주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할인마트나 편의점에 들러 사온 물건이 알게 모르게 쌓일 일도 없고,
그레이스가 온라인 주문 버튼을 지문이 닳도록 누르면
택배기사가 택배박스를 들고 문턱이 닳도록 찾아올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짐이 늘지 않는다.
날마다 바꿔 입을 외출용 복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바뀌는 계절에 맞춰 입을 제철 복장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옷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내일 네 사람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향할 목적지인 루나 게이트웨이는
달 근처에 띄운 우주정거장이다.
루나 게이트웨이는 달을 탐사하는 작업과
화성으로 향하는 유인우주선을 건조하는 작업을 지원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루나 게이트웨이가 있는 위치는
지구의 중력과 달의 중력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인 라그랑주 포인트다.
라그랑주 포인트는
공전하는 두 천체 사이의 중력과 그 주위를 공전하는 우주정거장의 원심력이 상쇄되면서
우주정거장이 사실상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평형점으로,
위성의 기존 궤도를 바꾸려할 때 필요한 속도요구량을 가리키는 델타-V가
최소한의 정도만 필요한 지점이라서 우주정거장을 설치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이사칠과 에밀리의 중간경유지이자 그레이스와 버지니아의 반환지점인 루나 게이트웨이는
지구와 달 사이에 있는 다섯 곳의 라그랑주 포인트 중 한 곳인 L1 포인트에 있다.
L1 포인트는 지구와 달을 연결하는 중계지점으로 적합해서
달에서 채굴한 각종 자원을 공급받기 유리한 곳이다.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정거장을 조립하는 곳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