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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가 따로 없네.
교도소는 바깥바람이라도 쐬게 해주고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게 해준다는데
여기는 탈옥도 못하고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선실도 처음부터 좁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좁아지는 것 같고...”
두 번째 생방송을 위한 리허설을 마치고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레이스가 투덜거렸다.
“언니, 그래도 우리는 조금 있으면 지구로 돌아가잖아요.”
버지니아가 소리 낮춰 한 말에
그레이스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이사칠과 에밀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레이스는 화제를 돌려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이사칠에게 질문을 했다.
“줄곧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요,
오빠는 화성에 가겠다는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작품을 하면서 배관공에 운동선수에 슈퍼히어로, 교수, 의사, 경찰, 스파이처럼
별별 직업을 다 연기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주인은 없더라고.
화성에 가는 우주인, 끝내주지 않니?”
이사칠은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다음 일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다음 일정은 버지니아와 하는 리허설이었다.
이사칠은 리허설에 돌입하기에 앞서 커피를 마시며 우주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려 했지만
머릿속에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그레이스의 푸념은 내내 그를 괴롭혔다.
그레이스의 푸념에 틀린 말은 없었다.
궁극적으로 보면,
그들을 비롯한 우주인들은 쇳덩어리로 만든 폐쇄된 공간에만 머무르면서
밖으로 나가는 건 꿈도 못 꾸는 죄수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레이스는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해 쉴 새 없이 주문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주인이 없는 그레이스의 집 앞에 배달돼 산을 이룬 택배 박스들이 기사화되고 화제가 되면서
뜻밖의 홍보효과를 거뒀는데, 이사칠은 그 효과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사칠은 자신을 비롯한 MS 대원들을
신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선 대항해시대의 탐험가와 비슷한 존재로 생각했다.
괴혈병 같은 각종 질환, 미지의 동식물,
잔잔하다가도 순식간에 급변해서 배를 침몰시키려 드는 궂은 날씨 등을 이겨내면서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어디엔가 있을 뭍을 향해 항해하는 뱃사람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폐쇄된 세계인 우주선을 타고 화성이라는 별을 개척하러 가는 탐험가로 생각했다.
역사책을 읽는 걸 즐기는 이사칠은
프랭클린 원정대와 벨지카(Belgica)호가 겪은 일에 대해 잘 알았다.
에레부스(Erebus)호와 테러(Terror)호 두 척의 배로 이뤄진 프랭클린 원정대는
1845년에 영국 해군으로부터 북서항로를 개척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출항했지만
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극해에서 빙하에 갇히며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이후로 소식이 끊긴 원정대가
질병과 기아와 온갖 사고에 시달린 끝에 대원 전원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이 짐작은 1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 두 선박의 잔해가 발견되면서 옳은 것으로 판명됐다.
벨지카호는 1897년에 남극을 탐사하려고 출항했다.
훗날 남극과 북극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물이 될 아문센이 승선해있던 벨지카호는
남극해가 얼어붙는 바람에 남극해 한가운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1년을 지내며
기아와 괴혈병,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다.
외부와 단절된 고립된 상황이 빚어낸 심리적 위기도 선원들을 괴롭혔다.
다행히도 벨지카호는 펭귄과 바다표범을 잡아먹으면서 굶주림과 괴혈병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위기를 넘기고는 남극해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빙하에 갇힌 두 원정대와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MS 프로젝트 대원들의 처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두 원정대의 대원들은 빙하에 갇혔기는 했지만 잠깐씩이라도 뭍에 올라 돌아다니면서
선실 밖의 공기를 쐴 수는 있었다.
그런데 바깥공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짓이었다.
두 원정대는 “날씨”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극단에 치달은 “날씨”라 할지라도 말이다.
맑은 날에는 뜨고 지는 해를 볼 수 있었고
두툼한 안개가 깔리거나 눈보라나 빗발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에는
해가 뜨고 지는 걸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주에는 그런 게 없었다.
날씨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선과 우주정거장 밖의 풍경은 항상 똑같았다.
간간이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나고 별들이 끝없이 위치를 바꿀 테지만
그걸 누가 눈에 띌만한 변화라 여기겠는가.
두 원정대는 추운 겨울을 보냈지만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레 변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겪었다.
그런데 우주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어둠을 헤치고 나가더라도 주변에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고,
계절의 변화 따위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MS 프로젝트라고 장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고 자신들의 위치와 주변 지형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두 원정대와 달리,
MS 프로젝트 대원들은 지구와 계속 교신하면서
자신들이 어디에 있고 주위에 무엇이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항해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이사칠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만약에 MS 대원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어느 쪽 상황이 나은 걸지 궁금했다.
프랭클린 원정대나 벨지카호 선원들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위치와 처한 상황도 알리지 못한 채로
외진 곳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서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를 온 세상에 다 알렸지만
그들로부터 “당신들을 구할 길이 전혀 없어 안타깝다”는 얘기만 들으면서
절망에 빠진 채로 목숨을 잃을 때를 기다리는 편이 나은 걸까?
지구를 떠난 이후로 갇힌 공간에서 열흘 가까이 지내며 암울한 생각을 하다 보니
살랑살랑 몸을 더듬고 지나가는 바람과 우산을 때리는 경쾌한 빗소리가 벌써부터 그리웠다.
바람의 손길에 몸을 떠는 풀잎들이 내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갓 피어난 꽃잎의 촉촉한 감촉과 나무와 결별하고는 바짝 말라버린 낙엽의 까끌까끌한 느낌이 그리웠다.
모래를 밟고 도망가는 두 발을 적시려고 악착같이 쫓아오는 파도의 쏴쏴거리는 소리와
바람이 그 위를 스칠 때 콧속으로 훅 파고드는 짠내가 그리웠다.
따스한 이불처럼 몸 전체를 덮어 나른하게 만드는 햇살이 그립고
금방이라도 녹색 물감을 뚝뚝 떨어뜨릴 듯 짙푸른 신록과 빨갛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단풍이 그리웠다.
자신에게 몸을 맡긴 꽃잎과 나뭇잎을 싣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겨울 햇볕에 반짝거리는 눈밭이 그리웠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라 생각해 소중한 줄 몰랐던 모든 것이 다 그리웠다.
잠을 설치게 만드는 모기며 열대야며 몸을 웅크리게 만드는 맹추위 같은 것은 빼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그것들도 그리워질지 모르지만.
이사칠은 MS 프로젝트가 추진될 거라고 하는데 거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에밀리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가는 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에밀리가 무슨 생각으로 지구를 떠나려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곧바로 에밀리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는 MS 프로젝트 합류를 다각도에서 검토해봤다.
화성을 상상하기 시작했고 지구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다른 별에서 살아가는 삶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려주지 않더라도
화성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며 외로운 길일 거라는 걸 깨달았다.
여행길에 오르고 오래지 않아 지구에 있는 온갖 것들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걸,
그럴 때면 크나큰 그리움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두고는
어떻게든 참아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