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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두고 온 집이 그리웠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남의 집이 된 그 집의 온돌방이 그리웠다.
제작사를 차리고 형편이 굉장히 좋아졌을 때 구입한 주택의 방 하나를 개조해 만든 거였다.
이사칠은 몸살 기운이 있다 싶으면
한국 마트에서 사온 쌍화탕을 데워 먹고는 바닥이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뜨거운 바닥에 몸을 지지고 난 다음날이면 언제 아팠냐는 듯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리워해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어쩌면 아무 소용도 없기에 그리움은 더욱 더 커졌다.
온돌방을 누리던 그 시절을 향한 미련은 모두 버리고,
그 시절을 인생의 좋았던 한때로 소중히 간직하고는
앞으로 화성에서 그에 못지않은 호시절을 일궈내자고 마음을 다잡아보려 애썼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령처럼 선실 벽을 뚫고 들어온 더블엑스 걸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체 일부를 살짝 노출시킨 고급스러운 옷차림에다
색기 넘치는 눈빛으로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이사칠을 껴안았다.
이사칠은 커튼을 닫고 불을 꺼서 선실이 어두운데도
그의 눈에, 정확히 말하면 그의 뇌에 뚜렷하게 감지되는 여성이 나타난 것에
잠깐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그 여성이 더블엑스 걸이라는 것과
그 여성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됐는지를 알아차렸다.
신기하게도, 이사칠은 자신을 껴안은 더블엑스 걸에게서 온기를 느꼈다.
더블엑스 걸은 이사칠이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항상 이사칠의 눈앞에 있었다.
이사칠이 불시에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라도
그녀는 어느 틈엔가 이사칠 앞으로 이동해 이사칠과 눈을 맞췄다.
이사칠이 사방의 벽을 타고 돌아다니더라도 순식간에 이사칠을 따라와서는
어느 벽에든 발을 굳게 디디고 서서 이사칠과 눈을 맞출 터였다.
이사칠은 자신과 더블엑스 걸이 지금 있는 곳은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에 찾았던 노을에 물든 한강변 카페라는 걸 깨달았다.
이사칠은 오래간만에 더블엑스 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이사칠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인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온 잠꼬대일 수도 없고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을 수도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새 많이 변했네. 솔직히 말하면, 늙은 건가?”
더블엑스 걸은 애정 어린 표정으로 이사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곁에 누우면 안 되는 거 알죠?”
이사칠은 더블엑스 걸의 방문과 살가운 모습에 마냥 기분이 좋았지만
그녀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건 피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 누운 게 아닌데? 너는 지금 서있는 거잖아.”
더블엑스 걸은 이 와중에도 농담을 했다.
“알아. 네 곁에 누울 수 있는 여자는 에밀리 뿐이라는 거.
그런데 그런 얘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나는 지금 네 뇌가 시키는 대로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사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미국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얘기를 들은 더블엑스 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니까 나를 불러낸 거잖니?
너를 거쳐 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여자들 중에서 나를 꼭 집어 불러내줘서 영광이야.
천하의 이사칠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정말로 고마워.”
“누나는 내 은인이니까요.
누나가 없었으면 난 지금도 여전히 한상진으로 살고 있었을 거예요.
외로움을 못 이겨 목숨을 끊었거나.
누나 덕에 이사칠이 돼서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거예요.”
“네가 이사칠이 될 거라고, 그렇게 되면 잘 나갈 거라고 예상했어.
그런데 지구를 떠나 화성까지 가겠다고 나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날짜변경선을 넘어 미국으로 가라고 한 거였는데
카르만 라인까지 넘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니?”
더블엑스 걸은 대견한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처럼 이사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내가 결혼하자고 농담했었던 것 기억하지?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내가 무안할 정도로 딱 잘라서 결혼은 못하겠다고 한 거니?”
이사칠은 그때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누나하고 관계에 선을 명확하게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몸으로 하는 사랑하고 마음으로 하는 사랑 사이에는,
장밋빛 미래하고 냉정한 현실 사이에는 또렷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렇게 사리판단이 분명한 애가 화성에는 왜 가려는 거야?
고생길인 게 훤한데.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공산이 100퍼센트고.”
“인류 발전에 기여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니까요.
내가 잘 하는 일을 해서 얻은 정보와 지식이 인류의 번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니 당연히 참여해야죠.”
이사칠이 화성으로 향하는 이유 중 일부인 게 분명한 대답을 들은 더블엑스 걸은
놀라는 척하며 환하게 웃었다.
“진짜로 거창한 이유네.
몰랐어, 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아이라는 걸.
내가 정말로 귀한 보물을 발견한 거였네.
그런데 왜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는 거야?
에밀리 얘기, 해도 괜찮아.
내가 그 얘기를 사방팔방 떠들고 다닐 수 있겠니?
여기 있는 난 진짜가 아닌데.
그러니까 에밀리 때문에 가는 거라고 얘기해도 돼.”
이사칠은 대답을 않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더블엑스 걸을 바라봤다.
그러자 더블엑스 걸이 조금 전보다 더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외롭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예. 사실은 그때보다 더 외로워요.
그걸 아는 사람은 에밀리 밖에 없지만요.”
“에밀리랑 화성에 가서 살면 외롭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화성에 가는 거야?
에밀리가 지구에서는 너랑 못 살겠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는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여주지 못하겠다고 해서?”
이사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도 있어요.”
“그러면 화성은 갈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겠네? 사랑하는 에밀리하고 함께라면?”
“에밀리하고 같이라면 어디든 천국일 거예요.”
“그래? 그런데 왜 나를 불러낸 거야? 에밀리하고 같이 있으면 행복할 텐데.”
이렇게 묻는 더블엑스 걸의 목소리에서 이사칠을 추궁하거나 짜증을 내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사칠을 포근하게 감싸고 달래주려는 듯한 따스함이 담겨있었다.
“에밀리가 루나 게이트웨이를 출발한 다음에야 너랑 같은 선실을 쓰겠다고 그래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이인데도 그 전까지는 따로따로 선실을 쓰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외로워서?”
이사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자신과 더블엑스 걸의 허상만 존재하는 선실의 어둠을 살폈다.
“길고 고독한 여행이잖아요.”
“그래서? 계속 와달라는 거야?”
이사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속 와줘요.
에밀리가 곁에 있을 때는 괜찮지만 이렇게 혼자서 자는 밤에는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아요.
앞으로는 더욱 더 외로울 것 같고요. 그러니까 나 혼자 있을 때 찾아와줘요.”
더블엑스 걸이 빙긋 웃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니?
너랑 헤어진 뒤로 네가 먹은 나이랑 똑같은 나이를 먹은 진짜 나는 지구에 있지만,
네가 보는 나는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언제나 네 머릿속에 있을 텐데.
언제든 불러줘. 곧바로 찾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