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화성인 247>

★ 57 ★

by 윤철희

이사칠은 더블엑스 걸이 마술을 부린 듯 홀연히 사라져

선실에 어둠만 남은 직후에 깜빡 풋잠이 들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을 때는 앨리스 원더가 이미 곁에 와있었다.

찰리 윤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지만

“마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병색은 찾을 길이 없고

만면에 화색이 돌아 건강미를 물씬 풍기는 모습으로.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모의 물이 한창 올랐던 십 몇 년 전의 에밀리 얼굴이 보였다.

이사칠이 건강한 앨리스의 얼굴은 에밀리의 그때 얼굴일 거라고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나타나자마자 이사칠을 껴안은 더블엑스 걸과 달리,

앨리스는 시종일관 이사칠과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

이사칠은 앨리스 생전에 앨리스를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거나 할 때처럼

불가피할 때를 제외하면 앨리스를 껴안은 적이 없었다.


앨리스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집의 뒷마당에서 볕을 즐길 때 짓던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짱한 내 모습은 처음 보지?

처음 만난 때부터 내가 보여준 모습은 아프고 꼴사나운 모습뿐이었으니까.

어때, 내 모습, 예쁘지?

당신한테 이렇게 예쁜 모습을 한 번쯤은 보여줬어야 했는데 아쉽네.

그렇기는 해도, 뭐 어때? 에밀리를 보면 되잖아? 그렇지?

우리 어렸을 때 사람들이 자매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그러면 걔는 질색하면서 신경질을 냈지만,

당신이 옛날 사진을 봐서 아는 것처럼 나랑 에밀리가 판박이처럼 닮은 건 사실이잖아?

날 보면서 에밀리 생각하니까 좋은가보네?

쑥스럽게 웃는 거 보니까. 내일모레면 쉰 살인 남자가 그렇게 쑥스럽게 웃으니까 귀엽다.”


앨리스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이사칠을 흐뭇한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는 참 고마워.

나를 정성껏 보살펴준 것도 고맙고, 내가 떠난 뒤로 에밀리를 살뜰히 챙겨주는 것도 고맙고.

에밀리가 당신을 당신이 해준 만큼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쌀쌀맞게 굴면서 항상 거리를 두는 건 유감이야.

걔가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 당신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마.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참 착하고 좋은 아이야.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게 변해버린 거야.

결정적으로는 우리 집안이 받은 저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만.

머리 좋고 예쁘고 착한 애가 집안을 잘못 태어난 바람에 고달프게 살아야 했다는 거, 알지?

앞으로 화성 가는 길에는 당신한테 살갑게 굴 거라는 것도 알고?”

이사칠은 동의의 뜻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앨리스가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에밀리는 우리 집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 거야?

그러면 나랑 걔랑 닮았으니까 내가 건강했다면 나를 좋아했을 수도 있었겠네?”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에밀리하고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해요. 운명이 맺어준 사이라고 생각해요.”


“와, 진짜 낭만적이다. 고등학교 때 보던 로맨스소설 같아.

그런데 말이야, 당신도 참 묘한 사람이야.

아무리 에밀리가 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렇지,

살면서 이뤄놓은 모든 걸 팽개치고 화성에 가겠다고 나서다니,

이렇게 헌신적인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에밀리가 화성 가자고 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솔직히 당신도 놀랐지, 그렇지?”


이사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뇌가 만들어낸 존재인 앨리스는 무슨 대답을 하건

그가 가진 정보와 그의 진심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앨리스는 화성으로 가자는 마음을 먹게 만든 여러 이유 중에서

이사칠이 남에게 결코 밝히지 않는 이유를 언급했다.

“‘이사칠 능력’을 잃는 게 그렇게도 싫었어?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도 싫었던 거야?”


에밀리가 화성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꺼내기 한 달쯤 전이었다.

늘 그래온 것처럼 그가 공개한 신작 영상에 대해 팬들이 올린 리뷰를 읽는 이사칠의 뇌에

작살처럼 날아와 박힌 글이 있었다.

이사칠도 아이디를 외울 정도로 그를 사랑하며 열성적으로 성원하는 팬이 쓴 글이었다.


“이번 신작을 보던 중에 문득

‘자진모리’와 ‘휘모리’ 같은 이사칠 특유의 테크닉을 최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2년간 공개된 출연작을 살펴봤더니,

9개월 전에 공개된 작품부터,

촬영하고 4개월쯤 뒤에 작품을 공개하는 업계 관행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3개월 전부터

그가 그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살펴본 결과

허리에 문제가 있어서 테크닉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 테크닉들을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자 왠지 우울하고 슬펐다.

그 테크닉들은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를 좋아한 이후로 우연히 한국의 전통음악인 ‘사물놀이’ 공연을 접했을 때

이사칠의 테크닉은 그 음악의 리듬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는 걸 깨닫고는 적잖이 흥분했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그 문화를 더욱 더 즐기게 된 사람으로서,

내 짐작이 틀려서 그의 테크닉을 다시 보고 특유의 한국적인 멋을 음미하게 될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그의 뇌에 단단히 박힌 그 글은 빠질 생각을 않으면서 이사칠의 신경을 아프게 건드리며 괴롭혔다.

그 글을 쓴 팬의 짐작은 옳았다.

실제로 그 팬이 지적한 시점부터 그의 허리에는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그는 특유의 테크닉을 구사하지 못했다.


이사칠은 ‘이사칠 능력’에 대한 앨리스의 질문에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항변하듯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이사칠 능력’이 없는 이사칠이 시체랑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 이사칠은 상상하기도 싫어요.

팬들이 왜 이사칠을 사랑하고 응원하겠어요?

이사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그게 당신이 화성에 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잖아?

사람들의 경멸하는 눈빛이 싫어서 가는 것도 있잖아?

티끌처럼 쌓이고 쌓여서는 태산처럼 짓누르는 무거운 시선들에서 해방되려고 가는 거잖아?”


“포르노배우라고 업신여기는 무수한 시선을 버텨낼 수 있는 건 팬들의 응원 덕분이었는데,

그런 응원이 없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화성으로 가는 이유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나는 에밀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화성에 가는 거예요.”


“그래, 사랑. 운명적인 사랑.

살던 별을 떠나 다른 별로 이주하게끔 만드는 사랑.

정말로 낭만적이야. 감동했어.

그게 당신의 자기최면이 아니기를 바라. 당신의 진심이기를 바라.”


“진심이에요.

에밀리를 사랑하니까 에밀리가 원하는 건 무엇이건 해줄 거예요.”

이사칠은 그렇게 읊조리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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