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
(이 글에는 제가 의도치 않게 쓴 스포일러가 잔뜩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 주세요.)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은 드물게 제작되는 정통 추리 장르 영화다.
<나이브스 아웃>이 공개되기 이전에
케네스 브래너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공개되고
그 뒤로 <나일 강의 살인>과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들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가 만들어졌지만,
정통 추리 장르는 할리우드에서나 국내에서나 잘 만들어지지 않는 장르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관객에게 짜릿함을 안겨주는 액션과 스릴러를 섞은 액션 스릴러 장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정적인 장르라서 관객을 사로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일 테고,
관객에게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제시하고는
기발하면서도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수수께끼풀이를 제공해
만족감을 선사하는 시나리오를 써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이 장르의 제작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일 것이다.
연출을 맡은 라이언 존슨이 시나리오 집필까지 겸한 <나이브스 아웃>은
탄탄한 시나리오로 승부를 걸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영화다.
중간에 차량 추격전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영화의 중심 줄기는 정통 추리극의 요소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저택의 특이한 구조,
각자 그럴싸한 범행동기를 가진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의심스러운 알리바이 등의 요소는
정통 추리극의 그것들이다.
한편, 존슨 감독은 살인사건의 전모라 생각되는 장면을
작품 중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파격적인 구성을 통해
2시간 넘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정신을 딴 데 팔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유명한 추리소설작가인 할런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생일파티를 마친 뒤 서재에서 목을 베인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생일파티에 참석해서 할런과 접촉했던 가족들을 심문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이 가족들 대부분에게는
트롬비가 죽어야만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거나
기존에 누리던 경제적 혜택을 잃지 않고 계속 누릴 수 있다거나 같은
범행동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밝혀진다.
그러는 동안 미지의 인물로부터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유명한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소개되고,
블랑과 형사들이 심문을 마친 뒤에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할런을 간병하는 간호사로 일하다 남들의 오해를 살 정도로 할런과 친해진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가 등장한다.
할런의 가족들은 입으로는 마르타를 “가족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하지만,
마르타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모를 정도로 마르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가족들이 말하는 마르타의 출신국은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 등이다).
<나이브스 아웃>의 특이하면서도 영리한 점은
영화의 중간 지점에서 마르타의 회상을 통해 할런이 어떻게 죽게 됐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르타가 할런에게 매일 주사하는 주사약이 아니라
모르핀을 실수로 주사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이 회상 장면은
영화의 성격을 순식간에 바꿔버린다.
할런이 그 짧은 시간에 마르타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줄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통해
그가 대단히 뛰어난 미스터리 작가였다는 걸 보여주는 이 장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을 보면서 즐길 준비를 하고 있던 관객들이
형편은 불우하지만 심성은 착한 마르타에게 동정심을 품고 마르타의 편에 서게 만든다.
범인이 밝혀졌다고 생각한 관객들은
어느 틈엔가 마르타의 범행이 밝혀지지 않기를,
마르타가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라이언 존슨은 마르타를 블랑이 주도하는 수사에 합류시키는 영리한 설정을 한다.
거기에다 마르타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하면 구토를 하는,
거짓에 대한 역류성 반응 체질”이라는 있을 성싶지 않은 특징이 있다는 설정을 덧붙이면서
관객을 한층 더 아슬아슬한 쪽으로 몰고 간다.
이제 마르타의 편이 된 관객들은 마르타가 범인으로 지목될 위기에 몰릴 때마다
조마조마한 심정이 돼서는 마르타가 위기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게 된다.
CCTV 비디오테이프와 숲 속 오솔길에 찍힌 발자국,
부서진 덩굴 지지대 파편 등 마르타에게 불리한 증거가 등장할 때마다
마르타만큼이나 아찔한 심정이 돼서는 수사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방향을 틀면서 정통 추리극의 궤도를 벗어났던 영화는
할런 트롬비의 유언이 공개되면서 또 다른 궤도로 진입한다.
유산을 한 푼도 못 받게 된 유족들은
이전까지는 감춰드려 애썼던 비열한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내면서
마르타를 위협하거나 회유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마르타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간절함은
한층 더 커진다.
라이언 존슨의 뛰어난 점은 영화의 초반과 중반 곳곳에 배치한 자잘한 설정들,
그러니까 짖어대는 개, 가정부의 투덜거림, 무대 소품과 진짜 물건의 차이처럼
관객들이 별생각 없이 받아들인 설정들이
이후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하게끔 만든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화려하고 현란한 비주얼을 연출하는 데 제약이 있는 장르이다 보니,
정통 추리 장르의 성패는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에 달려 있는 게 보통이다.
더불어 이 장르의 영화를 만들려면
관객들이 범인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도록 명성이 비슷한 수준에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해야 한다.
<나이브스 아웃>은 그 점에서도 성공적이다.
제이미 리 커티스와 돈 존슨, 토니 콜렛, 마이클 섀넌 등은
범인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 캐릭터들을 잘 연기해 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적인 연기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반듯한 이미지의 캐릭터로 관객의 뇌리에 영원토록 남을
크리스 에반스가 펼치는 망나니 연기다.
그의 비아냥거리는 연기는 꽤 인상적이다.
영화는 정통 추리극답게 사건의 발생 경위를 조리 있게 설명하며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결말을 보여준다.
범인이 연행되고 난장판이 수습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게 된 가족들은
아쉬움과 억울함과 서글픔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저택을 바라본다.
할런을 진심으로 간병한 것에 대한 크나큰 보답을 받은 것에 대한 심경을 정리하고는
2층 베란다로 나온 마르타의 눈과 가족들의 눈이 마주친다.
이 장면에서 마르타가 든 머그잔에 적힌 문구는 절묘하다.
<나이브스 아웃>으로 대성공을 거둔 라이언 존슨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글래스 어니언>과
조만간 공개될 <웨이크 업 데드맨>으로
브누아 블랑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나이브스 아웃>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사람들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을 가진 도망자가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드라마인
<포커 페이스> 시리즈도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