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247> ★ 58 ★
앨리스 원더는 에밀리도 찾아왔다.
에밀리도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 싱글싱글 웃는 언니는
자신의 외로움이 빚어낸 허상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에밀리는 고달프고 쓸쓸한 여행길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언니의 방문이 한없이 반가웠다.
에밀리를 찾아온 앨리스는 발랄하고 청순한 모습이었다.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자매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던 어머니가
퇴근해 저녁을 차리다 느닷없이 자매 앞에서 접시를 떨어뜨리고는 엉거주춤 춤을 춰
자매를 당황하게 만들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포르노배우가 되면서 약과 술에 손을 대 망가지기 이전의 모습이었다.
10대 중반이던 자신과 너무도 닮아서 쌍둥이 아니냐는 짜증나는 소리를 듣게 만든 모습이었다.
중력에서 해방된 에밀리의 머리카락이 자유로이 나풀거리는 것과 반대로
앨리스의 머리카락은 앨리스가 몸을 움직이더라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매가 화사한 햇빛을 받으며 뛰놀던 캘리포니아의 푸르른 잔디밭으로 변한 어두운 선실 안에서
에밀리가 싱그럽던 시절의 앨리스를 보고 반가워하며 낸 목소리는 짧았다.
“언니.”
“우리 동생, 여전히 예쁘네. 많이 힘들지?”
앨리스가 에밀리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힘들지 않아.”
“거짓말. 힘들지 않았다면 내가 왜 여기에 나타났겠니?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나는 네 언니잖아?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고, 거기다가 나는 네가 만들어낸 유령이잖아.”
에밀리는 묵묵히 앨리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앨리스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에밀리가 새침 떠는 걸 볼 때면 하던 특유의 몸짓이었다.
앨리스는 두 손으로 에밀리의 오른손을 살포시 감싸고는
에밀리 옆에 자리 잡은 뒤에 말을 이었다.
“우리 몸에 시한폭탄이 없었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엄마 몸의 시한폭탄이 그때 터지지 않았다면,
십 년쯤 뒤에 터졌다면 지금 나는 뭘 하고 있고 너는 뭘 하고 있을까?”
앨리스는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에밀리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옛날에도 네가 여러 번 했던 얘기잖아.
사람은 누구나 시한폭탄을 갖고 사는 거라고.
폭탄들은 터지는 시점은 다 다르더라도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라고.
그 얘기 하려던 거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은 거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거, 언니도 잘 알잖아?”
“그래서 너는 지금도 날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누구나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건데
나는 당장이라도 폭탄이 터질까봐 지레 겁을 먹고 인생을 자포자기하고는
즐길 수 있는 건 죄다 즐기고 죽겠다면서 난잡하게 사는 쪽을 선택한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때 ‘겁쟁이’라면서 언니한테 싫은 소리했던 거,
내색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속으로는 언니를 창피해했던 거 후회하고 있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
언니도 내 마음 잘 알 거잖아?”
“그렇게 나를 겁쟁이라고 부르면서 너는 용감한 애가 됐지.
엄마가 물려받아서 우리에게 물려준 불량한 유전자의 스위치가 어느 순간 켜지면
우리 몸이 제멋대로 춤을 추겠지만,
너는 언제 그런 날이 오건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놓인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용감한 아이가 되는 쪽을 택했어.
네 선택 때문에 내가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는 얘기, 내가 했지? 기억나지?”
어머니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어설픈 춤을 춘 날 이후로
나날이 상태가 심각해지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어머니에게 헌팅턴 무도(舞蹈)병 진단을 내린 의사는 10대 중반인 자매에게 설명했다.
“4번 염색체 위에 있는 염기의 반복서열이 비정상적으로 증가되면서 이상단백질이 발생해
뇌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엉겨 붙는 바람에 생기는 병입니다.
근육을 조정하는 능력을 잃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하고는 관계없는 근육운동이 일어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무도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유전성 질환입니다.
치사율이 높은 대부분의 우성 유전성 질환은
태아 때나 태어난 직후에 문제가 생기므로 영유아기 때 사망하지만,
이 병은 결혼하고 자식을 둔 이후의 연령대인 30~40대 때 주로 발병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질환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분도 이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분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검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발병을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대책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어머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일단 두 분이 확인하신 대로 운동장애는 나타났습니다.
다음에는 기억력에 이상이 생기고 인지능력이 저하되며
불안과 우울, 성격 변화 같은 정신적 문제도 일어날 겁니다.
이런 증상들을 완화하는 약은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발병이 되면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유전자 보유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는 에밀리의 물음에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족 중에 헌팅턴 무도병 환자가 있어서 보유자일 가능성이 높은 분들 중에도
검사를 받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보유 여부가 확인되더라도 대책이 없으니 차라리 모르고 사는 쪽을 택하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전체 인구 중에 헌팅턴 무도병 유전자 보유자의 비율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자매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성장하게 해주고 살아가게 해주는 유전자가
어머니와 화목한 가족을 망가뜨린 주범이고
자매의 미래의 삶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자매는 의사의 얘기를 듣고 고심한 끝에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앨리스는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알게 된 날, 앨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마녀가... 될 거래. 나는 화형을... 당할 거야.”
중세시대에는 헌팅턴 무도병을 마녀가 걸리는 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환자들이 화형을 당했다는 걸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앨리스는
중간 중간 울먹이며 숨을 거칠게 쉬는 바람에 그 짧은 문장을 얘기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에밀리는 기나긴 고심 끝에 마녀가 될 것인지 여부를 알아보지 않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은 에밀리의 손을 조종해 틈만 나면 검사기관의 홈페이지를 열었지만
에밀리는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에밀리는 유전자가 이상을 일으킬 때까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상을 일으키면 더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투병(鬪病)”은 어머니가 발병하고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병에 맞서 싸울 길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일으킨 유전자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앗아가는 것부터 시작한 이후로
시종일관 조금의 저항도 받지 않은 채로 여유만만하게 어머니의 심신을 공략했다.
유전자가 힘들이지 않고 승리하며 승전가를 부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매는 이상해진 유전자들이 체내에서 피우는 난장 앞에서
어머니가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끈끈한 전우애 덕분에 험난한 전쟁을 겪어내는 데 성공한 전우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