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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화성인 247>

★ 59 ★

by 윤철희

쌍둥이로 오해받던 자매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줄곧 같은 길을 걸어오던 자매의 인생행로는 큰 각도를 그리며 갈라졌다.

앨리스는 자신을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르노배우로 데뷔할 때 예명을 앨리스 원더로 지었다.

“나는 끈질기게 대를 이어가면서 우리 혈통에 속한 많은 사람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망할 놈의 유전자 때문에 마녀가 되느니

스스로 마녀가 되기로 결정했어.

어차피 마녀로 죽을 거면 마녀답게 살다 죽을 거야.”

앨리스는 자기 생각에 마녀다운 삶이라고 생각되는 삶을 살았다.


에밀리는 방탕하게 사는 바람에 병약해진 몸으로 더 방탕하게 살다 한층 더 병약해지는 언니를 보면서

의대에 진학했다.

원래부터 갖고 있던 의사가 되겠다는 희망이

언니를 보면서 “사랑하는 언니를 보살피는 의사가 되겠다”는 더 구체적인 목표로 변한 거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앨리스가 예전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해짐에 따라

에밀리의 목표도 수정됐다.

언니만이 아니라 언니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건강을 잃은 사람들을

더 많이 치료하고 보살피겠다는 쪽으로.


“나 때문에 의대에 가고, 나 때문에 여성의학과를 선택하고,

나 때문에 명문 대학병원에서 제의한 자리를 거절하고,

나 때문에 이쪽 바닥 애들을 보살피는 의사가 되고...”

앨리스는 에밀리가 선택한 경력들을 나열했다.

에밀리는 앨리스를 계기로

포르노업계의 작업 환경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신체에 무리가 많이 가는 작업을 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

사회가 천시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데 따른 정신적 부담감과

그 스트레스에서 도피하려고 손을 대는 중독성 물질 때문에

배우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 에밀리는

대학병원에 취직할 수 있는 기회도 포기하고는

배우들과 정기적으로 상담하고 그들이 자주 걸리는 질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쪽을 택했다.


에밀리의 선택에는 앨리스를 비롯한 여배우들을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도 한몫을 했다.

에밀리는 언니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동안

포르노배우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더라도 항의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목소리를 내더라도 귀 기울이거나 편 들어줄 사람이 적은 처지라는 것을 악용해

그들을 신체적으로, 금전적으로 착취하려고 혈안이 된 의사들을 여럿 접했다.

포르노 종사자에 대해 처음부터 우호적인 건 아니었던 에밀리의 태도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의사들의 행태를 겪으면서

차츰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는 입장으로,

자신이라도 먼저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으로 변했다.


“후회하지 않니? 그때 대학병원에 갔으면 출셋길이 열렸을 텐데.”


“후회하지 않아. 출세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사가 된 이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


“나 같은 사람?”

앨리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가 사랑하는 내 남편도 그래서 너한테 점수를 딴 거니?

너처럼 배우들 건강 챙기는 ‘쑥향 입히는 남자’라서?

아, 물론 나도 알아. 네가 나처럼 그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는 거.

너는 항상 그런 애였잖아.

좋아하면서도 내색은 않으려는 아이.

뭐, 네가 순전히 그 이유 때문에 그이하고 거리를 둔 건 아니었지만.

그이는 아무 여자하고나 몸을 섞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더 심하게는 법적으로 어엿한 형부니까 그런 거잖아.

그 사람 좋아하는 티를 냈을 때 사람들이 묘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을 가졌지만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던 이사칠과 에밀리의 사이는

앨리스가 세상을 뜬 뒤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더 애틋해졌다.

두 사람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사람들이 찰리 윤을 비롯해 주위에 몇 있었지만,

에밀리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기미가 느껴질 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힘껏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도, 이사칠과 에밀리는 법적으로는 엄연히 형부와 처제 사이였다.

설령 그게 위장결혼을 통해 맺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 “금단”이나 “터부” 같은 단어들이 표현에 동원될 관계였는데,

에밀리는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그런 단어를 쓰는 상황이 너무너무 싫었다.


게다가 포르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마음가짐 위에는

그들과 사적으로 어울리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사칠에게 품은 호감과 애정을 부정하려 부단히 애를 썼었다.

에밀리는 “사랑은 모든 걸 정복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었지만,

이사칠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의 어떤 것들은 천신만고를 다해야만 간신히 정복할 수 있고

개중 어떤 것들은 도저히 정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마다 차마 발을 디디지 못하는 곳이 있는 법이다.

자기 남자가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숱하게 많은 여자들과 공공연히 몸을 섞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에 있을까?

이사칠이 생계를 위해 그렇게 하는 거라는 게 명백한 사실일지라도

그걸 받아들인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사칠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족쇄가 부서진 것은

이사칠이 쑥을 태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계기는 이사칠이 출연하기로 돼있던 배우들이 몸이 좋지 않아 펑크를 내는 일이 연달아 일어난 거였다.

배우들 건강을 챙기는 것이

제작과 촬영을 원활하게 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이사칠은

한국에 있는 한의사 친구에게 연락했고, 친구는 쑥 좌훈(座薰)요법을 추천했다.

쑥을 태울 때 나오는 증기를 하체에 쐐서 여성 질환을 예방하거나 병세를 완화시키는 요법이었다.


이사칠은 한국 업체에 좌훈기 여러 대와 쑥을 주문했고,

그렇게 도착한 편백나무 좌훈기와 옥(玉) 좌훈기와 도자기 좌훈기 등을 촬영장에 설치했다.

여배우들은 처음에는 생전 처음 맡는 특이한 쑥 냄새를 꺼려하며 좌훈기에 앉는 걸 망설였지만,

좌훈기를 일단 경험하고서 몸에 좋은 요법이라는 걸 체험하고 나면

예정시간보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하거나

촬영을 마치고도 한참을 더 머무르면서까지 좌훈에 빠져들었다.


‘쑥향 입히는 남자’라는 이사칠의 별명은

좌훈을 한 이후에 여배우의 몸에 남은 향기 때문에 지어진 거였다.

좌훈이 배우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이사칠의 평판은 더 좋아졌고

아시아계 배우인 그와 촬영하는 걸 망설이던 배우들도 좌훈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선뜻 출연 계약서에 서명하고는 했다.

여배우의 몸에서 나는 쑥향은

그 배우가 최근 2, 3일 사이에 이사칠과 작업했다는 걸 알리는 광고판 같은 거였다.

결국 좌훈은 이사칠이 메인스트림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해준 신의 한 수가 됐다.

좌훈은 에밀리에게 전화를 걸 좋은 핑계거리이기도 했다.

이사칠은

자신과 에밀리는 서로에게 평범한 지인 수준을 넘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잘 아는 만큼 에밀리가

무엇 때문에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에밀리를 사랑하기에 에밀리에게 연락해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장악한 사랑의 감정은 그녀에게 연락하라고 그를 사정없이 다그쳤다.


이사칠은 출연하고 싶다며 연락해오는 여배우들을 통해

좌훈 얘기가 업계에 퍼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에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잘 지내느냐?”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넨 후

좌훈의 의학적 효능을 확인하는 논문을 쓸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에밀리는 처음에는 좌훈의 효능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여배우 여러 명에게서 좌훈을 하고난 후 건강이 여러 모로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사칠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에밀리는 좌훈의 효능을 연구한다는 핑계로

이사칠의 촬영장을 들락거리고 여배우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련 데이터를 취합했고,

연구 결과는 〈좌훈이 여성 질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여성의학 전문 저널에 게재됐다.


“그이랑 같이 연구하는 게 굉장히 재미있었어.”

이사칠과 연구하던 과정을 떠올린 에밀리가 흐뭇하게 웃으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지금 ‘그이’라고 그런 거 맞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네가 우주에 와서야 그 사람을 ‘그이’라고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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