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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화성인 247>

★ 60 ★

by 윤철희

이사칠은 논문 게재를 축하하는 의미로

에밀리와 연구에 참여한 여배우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기도 했지만,

연구를 계기로 한 단계 발돋움한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대체로는 사람들 앞에서 이사칠과 관계에 대해 당당한 태도를 보일 자신이 없던 에밀리 때문이었다.

이사칠은 에밀리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그는 에밀리를 영원토록 기다리겠다고 했다.

설령 에밀리의 입장이 영영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여배우들을 보살피는 일은 함께 정성껏 해나갔다.


“네가 참 자랑스러워. 너 같은 동생을 둔 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앨리스가 에밀리를 껴안고는 밝은 얼굴을 에밀리의 뺨에 바짝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지극정성을 다해 돌봐줬는데도 약에 다시 손을 대고 더 비참해진 아이들 말이야,

나라면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허무해서 다시는 그 아이들 상대하려고 들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착한 너는 잠깐 좌절했다가 금방 마음을 다잡고는 초심으로 돌아가더라.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니?”


“그게... 처음 몇 번은 내가 뭐하는 건가 싶었어.

혼자 울기도 많이 하고 그만 둘까 생각도 많이 했어.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별의별 인생이 다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의사인 나한테 필요한 건 나한테 치료를 받은 사람들 인생이 무조건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당장 내 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는 걸 깨달았어.

나한테 치료받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지만,

그 아이들이 이전보다 불행해진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는 걸,

내가 할 일은 이후로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들을 정성껏 치료해주는 거라는 걸,

보람은 이를 악물고 약을 끊고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이들한테

찾으면 된다는 걸 깨달았어.”


앨리스는 에밀리 곁에서 몸을 돌려 에밀리와 같은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별의별 인생을 다 인정하면서도 왜 내 남편은 받아들이지 않은 거야?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들하고 몸을 섞는 것만큼은 차마 인정을 못하겠어서?”


에밀리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서는 그게 그 사람의 직업이라고 인정하는데 가슴ㅇ로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아.”


“그래서 화성에 가는 거야?

화성에 가면 그 사람이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이랑 뒹구는 짓을 더 이상은 못하게 될 테니까?”


에밀리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진짜 이유가 그거였을까? 우리가 화성으로 가는 진짜 이유가?”


앨리스는 에밀리가 속삭이듯 내뱉은 말을 듣고는 웃으며 되물었다.

“진짜 이유가 뭐였는지는 너도 잘 모르는 거구나. 그렇지, 모르는 거지?”


화성행의 씨앗은 이사칠이 허리가 아프다며 에밀리의 진료소를 찾아왔을 때 뿌려졌고,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과정은

관련된 모든 요소가 적재적소에 등장해 상호작용하는 동안 매끄럽게 전개됐다.

마치 운명의 여신이 이사칠과 에밀리의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집필된 대본을 솜씨 좋게 연출하는 것만 같았다.


이사칠은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는 에밀리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투로 1년이 넘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에밀리는 발끈하면서 왜 일찍 찾아오지 않고 병을 키운 거냐고 화를 내고는

속이 상해 눈물까지 흘렸다.

잠시 후 냉정을 잃은 것을 민망해하며 차분함을 되찾은 에밀리는

이사칠을 세심하게 진찰하고는 허리를 너무 자주 쓴 탓에 발병한 퇴행성 질환으로 의심되는데

큰 병원에 가서 전문의를 만나고 첨단장비로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이 커피를 앞에 놓고

서로의 근황과 에밀리가 보살폈거나 보살피는 여배우들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은 휴게실에는

TV가 켜져 있었는데,

때마침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MS 프로젝트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화성으로 이주할 대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우리, 화성이나 갈까?”

뉴스를 본 이사칠은 별 생각 없이 던진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거기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한 사람이 바라본 장밋빛 미래에 대한 희망도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가 더 이상은 예전 같지 않을지라도,

‘이사칠 능력’을 잃더라도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벽을 타지 못하는 스파이더맨은 더 이상은 스파이더맨이 아니듯이

‘이사칠 능력’을 잃은 이사칠은 더 이상은 이사칠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랬다.

이사칠이 보기에 능력도 없으면서 이사칠로 남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었다.


이사칠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듣는 순간,

에밀리의 눈에 대원을 모집하는 전문분야 관련 안내 문구가 들어왔다.

안내 문구에는 화성 이주와 정착에 필요한 온갖 분야가 다 망라돼있었는데,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는 연령대에 접어든 지 몇 년 된 에밀리의 눈에는

그 중에서도 “의학”이라는 글자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어왔다.


화면 아래로 흘러가는 안내문구의 끝부분에는

“앞에 소개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여행과 이주에 필요한 경비를 지불할 수 있는 민간인도 프로젝트에 지원 가능하다”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화성으로 가겠다는 말, 진담이야?”


이사칠은 자신이 던진 농담에 에밀리가 정색하고 반문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에밀리는 이런 문제로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이사칠은

말없이 커피를 몇 모금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줘.”


이사칠을 촬영장으로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에밀리는

MS 프로젝트와 연줄이 있을 만한 지인들에게 연락해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의사인 에밀리가 전문성을 인정받아 정식 대원으로 선발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구에 일군 안정적인 입지를 포기하고 위험천만한 화성 이주에 나서려는 의사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칠은 프로젝트 측에서 인정하는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일반인으로 분류된 그가 정식 대원으로 프로젝트에 합류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여행경비를 지불하는 화성 이주 희망자로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이사칠은 프로젝트가 운운하는 “전문성” 얘기에 실소를 참지 못했다.

이사칠이 프로젝트에 합류하는 데 열성적으로 매달린 건 오기 때문이었다.

여론을 살피고 눈치를 봐야 하는 프로젝트의 입장은 이해하고도 남지만

이사칠이 종사하는 분야를 무시하거나 천시해서는

화성 이주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당연한 진실을 직접 입증해보이겠다는 오기.

자신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의 전문가 중에 전문가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오기.

어떻게든 프로젝트에 합류해 이사칠이 어떤 사람인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오기.

전문의의 진찰을 받지 않더라도 심각한 상태라는 게 짐작되는 허리 문제 때문에

배우 활동을 접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화성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이사칠이 화성에 가기로 결심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에밀리였다.

에밀리가 화성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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