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247> ★ 61 ★
에밀리가 화성행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계기는 역시 “그놈의 유전자”였다.
에밀리는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시한폭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시한폭탄의 폭발이 전혀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에밀리가 후성(後成)유전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건 그래서였다.
후성유전학은 부모로부터 시한폭탄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그 시한폭탄이 항상 터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활환경 같은 여러 후천적 요인의 작용에 따라 스위치가 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꾸준한 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들을 제시했다.
MS 프로젝트 뉴스를 들은 에밀리는 어느 정도는 희망에서 비롯된 의문을 품게 됐다.
화성이라는 환경은 스위치가 켜지는 걸 막는,
또는 적어도 켜지는 걸 최대한 방해하는 환경이지 않을까?
화성에 가서 화성인이 되면 마녀로 변하는 걸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화성으로 가는 도중이나 화성에 정착했을 때 스위치가 켜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진행한 의학적 연구와 그로부터 얻은 데이터를
세상에 남길 수 있을 터였다.
에밀리의 권유로 찾아간 전문의는 이사칠의 직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예상했던 얘기를 했다.
적절한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지만
현재 직업을 활발하게 해나가는 건 어려울 거라는 얘기였다.
이사칠은 마음이 찢어지듯 아픈 가운데에도 꼭 필요한 걸 물었다.
이 허리 상태로도 화성으로 가는 훈련을 받고 우주로 가는 건 가능하냐고.
현장에 의료인이 배치될 있을 테니
과도한 운동만 피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얘기를 들은 이사칠은
화성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에밀리를 찾아가 허심탄회한 얘기를 하던 중에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화성에 가려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알아봐줘.”
지인에게 연락해본 에밀리가 받아 든 청구서에는 5억 달러가 넘는 액수가 적혀있었다.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숫자를 앞에 놓고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정신을 추스른 후
태블릿 앞에 나란히 앉아 스프레드시트를 열고 숫자들을 입력했다.
이사칠이 제일 먼저 떠올린 자금 출처는 당연히 그가 차린 제작사의 매각 대금이었다.
이사칠은 업계 관계자들을 통해
“올림픽 규격 수영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정액을 배출해서 차린” 소중한 제작사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알아봤다.
그 긴 세월 동안 제작한 작품들의 라이브러리에 대한,
그리고 이미지에 조금의 흠집도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서 명가(名家)라는 평판을 듣는
제작사 브랜드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이사칠이 느끼는 자부심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실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간간이 그를 괴롭히는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조금이라도 더 후한 값을 쳐줄 투자자를 찾아내려고 미국에 처음 왔을 때처럼 열심히 돌아다닐 때였다.
교차로에서 빨간불을 받고 차를 세웠을 때
교차로 건너편 건물 옥상에 MS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광고판이 보였다.
황폐한 화성의 땅을 디디고 선 우주인이 우주복 헬멧을 벗고
화성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새파란 지구와 작열하는 태양과 싸늘한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광고판을 본 순간,
이사칠은 우주에서 퍼포먼스를 벌여 자금을 조달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러자마자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찬란한 빛으로 덮였다.
그는 환상에 빠졌다.
자신이 직접 광고판으로 들어가는 환상에.
환상 속의 그는 우주복과 헬멧을 벗고는 화성에 생명의 씨앗을 뿌릴 채비가 돼있었다.
지평선 위에 뜬 지구를 바라보며
화성을 “제2의 지구”이자 지구보다 더 살기 좋은 별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의 환상은 뒤차가 울린 경적 때문에 얼마 안 가 깨졌지만
그 그림판의 이미지에 맞먹는 빼어난 이미지를 대중에게 보여주자는 아이디어는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우주를 퍼포먼스의 무대로 삼아 포르노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역사적 의의도 있는 퍼포먼스를 하자는 아이디어가 뿜어낸 광휘는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꿈쩍도 앉던 불안감을 깡그리 녹여 없앴다.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환경이 안겨주는 여러 어려움을 감안하면
퍼포먼스 횟수를 많이 잡을 수는 없었다.
여행일정을 입수한 이사칠은 우주정거장과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한 번씩 2회 공연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첫 퍼포먼스는
얼굴이 알려지고 노련한 기존 배우와 공연하고
두 번째 퍼포먼스는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와 공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음은 루나 게이트웨이까지 갔다가 지구로 복귀할 배우들을 확보할 차례였다.
생방송의 성격상 호흡이 착착 맞고 믿음직한 배우여야 했는데,
그런 배우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건 쉬웠지만 실행하는 건 어려웠다.
화성까지는 고사하고 우주로 가겠다고 나설 배우조차 찾기 힘들었다.
하긴, 누가 그 힘든 훈련을 다 받고 그 큰 위험을 감수하려 하겠는가?
이사칠은 갖은 어려움 끝에 그레이스 오와 버지니아 스타를 어렵사리 설득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두 배우에게 지급할 비용과 관련한 협상이 진행됐다.
훈련 기간 동안 활동하지 못한 데 따른 기회비용,
우주로 가는 위험수당 등 기존에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에 대한 합의는
생각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이뤄졌다.
두 배우가 우주에 갖다 오면서 얻을 명성과
그 명성이 안겨줄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의 매출과 비용을 추정해본 결과
대성공을 거뒀을 때 벌어들일 최대 예상치로도
프로젝트에 지불해야 하는 여행경비의 절반 정도 밖에는 감당이 안 된다는 난감한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퍼포먼스 성격상 퍼포먼스를 진행하려면
MS 프로젝트를 비롯한 각종 기관의 승인과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MS 프로젝트에 그 얘기를 꺼냈지만 당연히 MS 프로젝트는 딱 잘라 거절했다.
프로젝트 측이 퍼포먼스를 승인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건
이사칠의 모자란 여행경비를 보조하겠다고 나선 스폰서의 입김과
이사칠을 합류시켰을 때 프로젝트 측이 얻게 될 거라고 에밀리가 제시한 유무형의 이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