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한국영화계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대신 OTT로 영화를 감상하는 추세가 확고해졌고,
그러다 보니 극장용 영화에 대한 투자가 대폭 줄었으며,
그 결과 극장에서 관람하고픈 영화의 절대적 편수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이어질 거라는 불길한 관측이 나오는 이때,
남대중 감독이 연출한 <30일>은
영화계가 위기 타개를 위해 연구 교재로 삼아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30일>은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서 뽑아낸 현란한 비주얼과 사운드로
관객을 압도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관객에게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고민할 화두를 던지거나
깊은 감동을 선사하려는 예술영화도 아니다.
<30일>은 러닝타임 두 시간 동안 관객을 즐겁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한 끝에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기억상실”은 영화와 드라마가 오래도록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은 소재다.
<30일>은 더 이상 우려낼 것도 없을 듯한,
뻔한 이 소재를 가져다 재치 있게 비틀어서는 자연스러운 재미를 뽑아낸다.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면서 웃음을 끌어내는 아기자기한 구성,
억지로 웃음을 뽑아내려고 들지는 않는 수준의 오버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귀에 착착 꽂히는 대사와 영리한 음악 및 비주얼 활용 등이 돋보이는 영화다.
<30일>은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소박한 야심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그렇기에 한국영화계는 이 영화를 찬찬히 살펴보고
이 영화의 미덕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영화는 결혼식이 열리기 직전에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도망친 홍나라(정소민)가
슬픔에, 그리고 술에 빠져있는 노정열(강하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은 “딸 바보” 장인(임철형)이 총기를 들이대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하는데도
딸을 사랑하는 장모(조민수)의 은근한 지원을 받은 덕에 “기우는 결혼”에 성공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성격 차이 등의 여러 이유 탓에 애정이 철철 넘치던 로맨스 장르에서
야구공이 얼굴을 스치고 날아가는 스릴러 장르로 변하고 만다.
이혼을 결심하고 찾은 법정에서도 서로를 디스 하던 두 사람은
30일간 숙려기간을 가지라는 탐탁지 않은 권고를 받는다.
그렇게 법정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해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고 만다.
“기억상실”은 이야기 전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써먹기에 너무나 편리한 설정이라서
(특히 싸구려) 영화와 드라마에서 숱하게 많이 다룬 소재다.
<30일>은 뭔가 새로울 게 있을까 싶은 이 설정을 상당히 영리하게 활용한다.
주인공 한 사람의 기억을 빼앗는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리,
<30일>은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쯤 지난 시점에 남녀주인공 모두의 기억을 빼앗는 신선한 시도를 한다.
이제 “이혼할 사이”가 된 두 사람은 “제2의 신혼생활” 비슷한 생활에 돌입한다.
“기억은 되찾게 만들되 이혼은 반드시 시킨다”는 양가 부모의 합의 아래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게 된 것이다.
기억을 잃은 정열과 나라가 애증으로 점철됐던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접하면서 보이는 반응은 재미있다.
거실에 잔뜩 놓인 술병을 본 나라는
“남편이란 자가 얼마나 술을 마셔대면 이혼을...”이라고 얘기했다가
술을 마신 사람이 자신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술을...”로 태세를 전환한다.
“정신적인 기억”은 잃었어도 “몸의 기억”은 잃지 않았기에 나라는 느닷없이 정열의 뺨을 때리고,
두 사람은 무심결에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화장실을 같이 쓰다 민망해하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두 사람을 도와주는 캐릭터들도 영화의 재미를 한껏 북돋운다.
정열의 선배(윤경호)와 친구들(이상진, 원우), 나라의 친구들(엄지윤, 송해나)은
독특한 개성과 맛깔나는 대사로 두 사람의 첫 만남과 연애, 균열이 점점 커지는 결혼생활을 소개한다.
<30일>은 숱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클리셰가 돼버린 요소들을 많이 활용하지만,
그것들을 안이하게 써먹지는 않는다. 정열이 클럽에서 기절한 나라를 구할 때,
관객들은 두 사람의 연애가 그때부터 시작됐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의식을 찾은 나라가 반해서 사귀게 된 대상은
정열이 아니라 응급실 의사였다는 식으로 클리셰를 피해 간다.
정열이 나라의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호텔 장면이나
나라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정열을 찾아온 장모가 뜬금없는 설명조 대사로
정열의 등을 떠미는 장면도 재미있다.
영화는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돌아온다”는 클리셰도 활용하지만,
그 순간에도 정열을 곧바로 쓰러뜨리는 대신에
정열이 나라와 나미를 상대로 섬뜩한 행동을 하게 만들어서 재미를 배가시킨다.
<30일>은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영화다.
경제력이 없는 탓에 자격지심이 있는 정열의 “백수 타령”과 그에 대해 나라가 보이는 반응도,
정열이 열받아서 소리 지를 때 헤비메탈 음악을 활용하는 것도,
스위스로 가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도,
나라의 손동작 한 번에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는 정열의 공항 고백신도 재미있다.
<30일>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다.
재미와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맡겨진 각자의 역할을 100퍼센트 수행해 내는 캐릭터들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캐릭터는
시계를 풀려고 하기는 하지만 손목에서 시계를 뺀 적은 없는 나라의 어머니와
두 사람과 같이 살면서 감시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나라의 여동생 나미 캐릭터다.
이 캐릭터들을 연기한 조민수와 황세인은
과장되기는 했지만 절대로 오버하지는 않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히 조민수가 등장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영화는 독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다.
영양가는 하나도 없더라도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독서에 버릇을 들이면
이후로 차차 영양가 있는 책도 읽게 되는 것처럼,
적은 제작비로도 오락적인 영화를, 그러니까 딱 <30일> 같은 영화를 만들어 관객을 즐겁게 해 주면
관객들은 이후에도 재미있는 영화를 보려고 극장을 찾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작품성 있는 예술영화에도 맛을 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작진이 창조한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어두운 공간을 찾아 들어온 관객에게
즐겁고 재미난 경험을 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제작진이 추구해야 할 제일 중요한 미덕 아닐까?
그 미덕이 실현됐을 때 관객들은 극장을 찾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