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을 적(赤), 붉을 홍(紅) 등
포토샵 같은 걸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현실 세계의 색상은 “무수히”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로 많다.
그렇지만 우리의 언어생활은
파란색을 지칭할 때 “#0000FF”라고 말하고
그 근처에 존재하는 색상들에도 해당 색상의 코드를 말하는 식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글자는 색상코드와 달리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0000FF” 주위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코드의 색상을
“파란색”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할 수밖에 없다.
한자에는 색(色)을 가리키는 글자가 많다.
그런데 한자 문화권의 중심이 되는 색상은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오방색(五方色),
즉 “흑(黑)·청(靑)·적(赤)·백(白)·황(黃)”의 다섯 색이다.
이 중에서 검은색과 흰색, 노란색은
黑과 白, 黃이라는 글자가 해당 색을 대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골계(烏骨鷄)”에 들어있는 “까마귀 오(烏)”에 “검은색”이라는 뜻이 있고
“소복(素服)”에 들어있는 “바 소(素)”에 “흰색”이라는 뜻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색, 그러니까 빨간색과 파란색의 경우는 해당 색을 가리키는 글자가 여럿 있다.
이번 글에서는 빨간색을 나타내는 글자들부터 다뤄보겠다.
빨간색은 “불(火)”의 색깔이자 “피(血)”의 색깔이다.
정열, 폭력 등의 이미지를 가진 색이기도 하고
“공산당”을 대표하는 색이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가진 색이기도 하다.
빨간색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자는 “붉을 적(赤)”이다.
“赤”은 “큰 대(大)”와 “불 화(火)”가 합쳐진 글자다.
지금의 글자를 봐서는 그 두 글자가 합쳐진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큰 불”이 났을 때 사방을 물들이는 “시뻘건 색”에서 “빨갛다”는 뜻이 파생된 듯하다.
“赤”에는 “벌거숭이,” “벌거벗다” 등의 뜻도 있다.
“(어떤 사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나다”는 표현에 쓰이는 “적나라”는
“赤”과 “벌거벗을 나(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벌거벗다”는 뜻이 세 번이나 중복된 단어다.
“赤”을 두 개 나란히 놓으면, “빛나다,” “밝다”는 뜻을 가진 “붉을 혁(赫)”이 된다.
빨간색을 뜻하는 또 다른 글자로 “붉을 홍(紅)”이 있다.
“실 사(糸)”와 “장인 공(工)”이 합쳐진 것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紅”은 실을 염색하는 작업과 관련이 있는 글자인 듯하다.
여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붉은색”을 가리킬 때 “赤”을 주로 쓰지만
중국에서는 “紅”을 주로 쓴다고 한다.
고려를 침략한 도적 무리인 “홍건적(紅巾賊)”과
중국의 고전 문학작품 <홍루몽(紅樓夢)> 등의 명칭에 “紅”이 들어 있고,
중국의 국기 이름이 “오성홍기(五星紅旗)”이며,
1960년대~70년대에 중국을 휩쓴 문화혁명의 선두에 서서 기성세력을 공격한 학생들을
“홍위병(紅衛兵)”이라고 부른 걸 떠올리면 맞는 얘기인 것 같다.
“붉을 주(朱)”도 빨간색을 가리키는 글자다.
“朱”의 자원(字源)에 대해서는
“나무 목(木)”의 기둥에 점을 찍어 나무기둥의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가
“붉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는 설명이 있다.
“구슬 주(珠)”에 “朱”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영롱한 빨간색을 가리킬 때 “朱”를 쓰는 것 아닌가 상상해 보게 된다.
동양 문화권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네 마리의 신령한 짐승(神獸),
즉 북쪽의 현무(玄武)와 동쪽의 청룡(靑龍), 남쪽의 주작(朱雀), 서쪽의 백호(白虎)에서
남쪽을 대표하는 색상으로 “朱”가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귀신을 쫓으려고 부적을 쓸 때 사용되는 물감의 원료가
“경면주사(鏡面朱砂)”라는 점을 놓고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朱”는 신령하거나 영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붉은색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글자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가 지은 “이 몸이 죽고 죽어”로 시작되는 시조의 제목은
“붉을 단(丹)”이 들어간 “단심가(丹心歌)”다.
“丹”은 갑골문에는 한글 ㅍ을 사다리 모양으로 돌려놓은 듯한 모양과
그 안쪽에 찍힌 점으로 적혀 있다고 한다.
“丹”은 돌려놓은 사다리 모양이 경면주사를 캐는 광산의 입구를 가리키고
가운데의 점은 경면주사를 본떠 만들어진 상형자로,
경면주사의 붉은색에서 “붉다”는 뜻이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丹”은 “단”으로 읽는 게 일반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란”으로 읽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유목민족인 “거란”은 한자로는 “契丹”이라고 쓴다.
“丹”을 “란”으로 읽는 또 다른 경우로는
꽃 이름인 “모란”을 “牧丹(목단)”이라고 쓰고 “모란”이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