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기억하지 못해 자신도 의심해야 하는 남자 이야기

<메멘토>

by 윤철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출세작인 <메멘토>는

사고를 당해 뇌를 다친 이후로는 10분 안팎의 시간만 기억할 뿐

그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 시간에 생긴 기억을 상실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독특한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메멘토>는 특이한 내용과 형식 때문에

“어떤 기억이 담긴 기념품”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memento”라는 제목이

우리나라에서는 “건망증(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일 정도로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영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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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시 보면서

놀란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많은 영화들이

“시간”에 얼마나 천착하고 시간을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됐다.

놀란은 <인셉션>에서는 꿈의 단계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 다른 것으로 설정했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외계행성에서 흐르는 시간은 무지하게 빠르다고 설정하는 한편으로

주인공이 시간을 역행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오게도 만들었다.

<덩케르크>에서는 경과된 시간이 각기 다른 육지와 해상과 공중을 교차 편집해서

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는 영화인 <테넷>에서는 역행하는 시간을 연출하는가 하면

시간의 순행과 역행이 동시에 일어나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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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듯,

놀란은 <메멘토>에서는 경과된 시간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서는

나중 시간의 조각 뒤에 앞선 시간의 조각을 붙이는 식으로 조각들의 순서를 바꾸는 한편으로

과거의 시간을 흑백 화면으로 삽입하는 독창적인 시도를 했다.

놀란의 그런 연출 선택에 의해,

나는 <메멘토>를 보는 동안 레너드가 처한 것과 비슷한 상태를 경험했다.

시간 순서대로 쭉 흘러가는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한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으려고

앞선 시간대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으려 잔뜩 긴장해서 영화를 봤는데,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니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그 내용을 순서대로 옮겨보려 하는 순간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영화를 봤을 때도 영화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영화가 새롭게 다가왔다는 사실까지 깨닫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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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전히 내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낸 <메멘토>의 줄거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마약 딜러의 뒤를 봐주던 형사가 꾸민 음모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다룬다.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꽤나 뛰어난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데,

수작 스릴러라는 평가에 머무를 수도 있던 이 영화를

오랜동안 관객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건

주인공인 레너드(가이 피어스)의 증상을 모방한 이야기 전개 형식,

그리고 영화 내내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사진과 글씨가 빼곡한 메모,

날카로운 느낌의 폰트로 레너드의 몸 곳곳에 새겨진 문신 같은 강렬한 비주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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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내가 범죄 피해를 입는 걸 막으려다 사고를 당한 그는

사고 이전의 일은 온전히 기억하지만 사고 이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이 병증 탓에 그는 세상사람 모두를 불신하고 의심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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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신뢰하지 못할 사람들은, 의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다.

그는 중요한 정보를 메모하고 더욱 중요한 정보는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그런데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의 자신도, 심할 경우에는 바로 10분 전 과거에 생각하고 활동하던 자신도

의심해야 하는 처지다.

“특정 시점의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때문이다.

그가 메모하거나 문신을 새기는 시점에

분노나 비합리적 판단에서 비롯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겼다면 어떻게 할 건가?

나탈리(캐리앤 모스)가 그를 이용해 먹으려 들 테니까 “그녀를 믿지 마라”라고 적어 넣으라는

테드(조 판토리아노)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척하다 슬그머니 그 문장을 지워버릴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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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로봇 같은 존재다.

그 시점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의 뇌에 데이터로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나탈리와 테드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그런 대접을 받더라도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메멘토>의 뛰어난 점이자 궁극적인 미스터리를 낳는 건

“과거의 레너드 자신이 기억을 조작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그를 이용해 먹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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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에 묘사된 레너드의 상태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허점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심장이 있는 부위에는 문신을 새기지 않은 이유를 묻는 나탈리에게

복수를 끝냈을 때 그 사실을 새겨 넣으려고 비워둔 거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 이후로 문신을 새겨 넣기 시작했을 그는

그 부위를 비워놓은 이유를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그는 자신이 기억을 대체할 체계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 체계란 메모를 하고 문신을 새기는 걸 말한다

(동영상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요즘이라면

동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유튜브 채널에 올리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독창적인 영화 <메멘토>는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장기 기억력이 고장 난 이후에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세운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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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서 <메멘토>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카메라가 막 뱉어낸,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또렷해지는 폴라로이드처럼 흐릿하기 그지없지만,

영화를 처음 보고 4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은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선명한 기억이자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장면은

레너드와 도드(칼럼 키스 레니)가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장면이 시작되면 레너드는 자신이 도드를 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러기 무섭게 도드가 총을 쏘자 레너드는 자신이 도드를 쫓는 게 아니라

도드가 자신을 쫓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도망치기 시작한다.

“탈룰라급 태세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우리가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경우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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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영화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으려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흐르고 나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생각을 제외한 영화의 내용이 희미해질 게 분명하다는 기분이 든다.

나도 <메멘토>의 내용을 몸에 문신으로 새겨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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