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완벽한 타인>은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Perfetti sconosciuti)>를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끔 각색한 리메이크영화다.
원작영화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25차례나 리메이크된 것은
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드는 영리한 설정의 핵심인
스마트폰이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자
우리 각자의 내밀한 정보가 잔뜩 담긴 귀중품으로 자리 잡은 것은
만국 공통의 현상이라는 걸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완벽한 타인>은 스마트폰이 우리가 들고 다니는 “제2의 뇌”가 돼버린 시대상을,
어떤 면에서는 “체내에 있는 뇌”의 역량을 퇴화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체외의 뇌”가 돼버린 시대상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러닝 타임의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티격태격하고 치고받으면서
오랜 세월을 친구지간으로 보낸 네 남자와
그중 세 명의 부인들이 치르는 집들이가 차지한다.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는 문자와 전화를 참석자 전원에게 모두 공개”하는 게임을 하자는
무심결에 나온 제안에 참석자들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일부는 마지못해 동의함에 따라
직업도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인 성인 일곱 명이 모인 식사 자리는
언제 터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팽배한 바늘방석으로 바뀐다.
가벼운 장난처럼 시작된 이 게임이
사실은 정말로 치명적인 게임이라는 것이 판명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딸 소영(지우)의 전화를 빌린 석호(조진웅)가
바람둥이 준모(이서진)에게 야릇한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장난을 친 순간부터
중년 남녀들이 저녁 식사를 하며 벌이는 떠들썩한 소동을 보여주는 영화일 것 같았던 영화는
순식간에 스릴러 장르로 탈바꿈한다.
그 이후로 캐릭터들과 관객들은
문자가 왔다는 알림음과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바짝 긴장하게 된다.
<완벽한 타인>이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흥미진진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가 된 데에는
원작의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며 우리 문화에 맞게끔 솜씨 좋게 각색한 시나리오와
그걸 바탕으로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한 이재규 감독(그리고 제작진)의 역량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완벽한 타인>의 시나리오는
캐릭터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동시에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설정들을 차례차례 제시하면서
그것들 때문에 비롯된 난관들을 집들이 참석자들이 그럴듯한 해법을 내놓으며 돌파해나가게 만든다.
더불어,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는
하나같이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비슷한 연배에 생활환경도 비슷한 사람들이 주고받을 법한 쫀득한 대사다.
“남자는 안드로이드폰이고 여자는 아이폰”이라며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스마트폰에 빗대는 대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이재규 감독의 연출력은 러닝 타임의 90퍼센트 가까운 시간 동안 공간적 배경을 제공하는
석호와 예진(김지수)의 집 내부를 뛰어나게 활용하는 면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석호와 예진의 집이 거실과 주방, 화장실 등이 하나같이 널찍하고
경치 좋은 베란다까지 딸려있는 고급주택이라고는 해도,
이 영화의 설정은 역량이 딸리는 감독이 연출했을 경우
관객에게 폐소공포증을 안겨주는 작품을 내놓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설정이다.
그렇지만 이재규 감독은 다양한 구도와 앵글을 활용해
안정적이면서도 다채로운 화면을 내놓는 것으로
관객에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는다.
위험천만한 게임에 참가한 이들이
게임을 시작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혀 쩔쩔매는 것을 보다 보니
어쩔 도리 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친한 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저런 게임을 할 수 있을까?”
못한다.
참석자 중 누군가가 총을 들이밀면서 게임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한
이런 치명적인 게임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다.
아니, 총을 들이밀더라도 하지 않을 거다.
게임하는 내내 무슨 민망한 연락이 들어올까 바짝 긴장하다가
문자 수신음이나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마구 치솟는다.
당신은 어떤가?
나는, 당신은, 우리는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을 갖고 있다.
어떤 비밀은 남모르게 입은 상처이고
어떤 비밀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이며
어떤 비밀은 남에게는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다.
비밀의 성격은 다 다를지언정, 그리고 그 비밀의 개수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런 비밀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완벽한 타인>에 등장하는 게임은
그런 비밀을 가려놓은 위장막을 치워서는 그 내용을 만천하게 공개해 버리는 위험한 게임이다.
게임을 치르는 동안 각각의 인물들이 감추고 싶은 치부가 드러난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던 인간관계는,
단란해 보였던 부부관계와
심지어 40년간 끈끈하게 이어져온 우정조차 박살 나기 직전의 상태로 내몰린다.
이건 정말로 파괴적인 게임이다.
이런 게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위반자를 처벌해야 옳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완벽한 타인>에는 재미있고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태수(유해진)가 꼭꼭 감춰두고픈 비밀이자
엉겁결에 태수와 손잡게 된 영배(윤경호)의 비밀까지 폭로되게 만드는
“키티 잠옷 여자” 설정은 재미있다.
분양 사기를 당한 석호가 경찰이 걸어온 전화를 보이스피싱이라며 끊어버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내가 저 입장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를 오래 고심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석호가 남자친구와 외박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딸에게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다.
많이 개방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성적인 문제에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심지어 개방적이라는 미국사회에서도 이건 공개된 자리에서 논의하기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참석자 모두가 보고 듣는 가운데 석호가 딸에게 피력하는 의견은
딸 키우는 부모가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내놓을 최선의 의견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령 그게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서 내놓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의견일지라도 말이다.
<완벽한 타인>은 꽤나 잘 만든 영화지만, 불만스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월식이 끝난 이후의 장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임을 하지 않은, 그래서 모두가 속내와 비밀을 지키고는
평화로운 삶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결말을 말하는 거다.
게임을 한 결과로 참석자들 각자가 비참해지면서
씁쓸한 심정으로 각자의 갈 길을 가는 냉혹한 결말을 관객에게 안겨주는 결말을,
아마도 흥행에 심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결말을 피하고 싶었을 제작진의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이 결말이 흥행을 염려하는 제작진 입장에서 채택할 최선의 결말이라는 것도 납득한다.
그런데 이런 결말을 취한 결과,
제작진이 전한 메시지는 “이런 게임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에 머무르고 만다.
그런데 굳이 제작진이 그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더라도
이런 게임을 할 생각이 없는 나는 무척이나 불만스럽다.
냉혹한 현실을 까발리면서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보낸 영화라면
더욱 싸늘하고 섬뜩한 결과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었어야 옳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