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윤종빈 감독의 2012년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건달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존재인 “반달 최익현 선생”이
“강한 자가 살아남는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겪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가 히트한 이후 부산 사투리 억양으로 말하는 “살아있네”라는 대사가 유행했고
요즘에도 가끔씩 사용되는 걸 들을 수 있는데,
“살아있네”와 그것을 변형한 대사는 영화 곳곳에 등장하면서
민심 악화라는 궁지에 몰린 정권이 범죄세력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고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상기시킨다.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10년 정도의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쯤의 한국 사회가 꽤나 부패한 곳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장기하가 리메이크한 “풍문으로 들었소”가 깔리는 가운데
조폭 세력이 당당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은
당시 한국사회 전체에 부정부패가 만연해있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영화는 그 시대의 부정부패는 체계화돼 있었다는 걸,
그리고 한 사람이 가진 연줄과 인맥 등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사회적 출세와 성공을 좌지우지했다는 걸 차근차근 보여준다.
영화는 부제에 언급된 “나쁜 놈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조직폭력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도입부에서부터 보여준다.
최익현(최민식)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항구인 부산항을 담당하는
몇 명 되지 않는 세관 직원 중 한 명이다.
야밤에 세관에 잠입해 물건을 빼내가려던 놈들과 맞서 싸우던 익현은
컨테이너에 실려 밀반입된 마약을 발견하고는 빼돌린 후
부산 지역을 호령하는 조폭 두목 최형배(하정우)를 찾아가
마약을 유통할 경로를 확보하려 든다.
형배가 손자뻘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형배를 막 대하다가
형배의 부하 창우(김성균)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도 겪지만,
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형배로부터 큰절을 받는 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이 인연을 통해 형배 패거리에 합류해 “반달”이 된다.
형배 패거리는 경찰과 검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을 종횡하며
로비스트와 브로커 노릇을 수행하는 익현의 수완에 힘입어 승승장구한다.
익현은 한때 같은 조직에 있었지만
이제는 경쟁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판호(조진웅)가 관장하는 알짜배기 업소를 탈취하는 것을
“명분이 없다”며 꺼려하는 형배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명분을 제공하는 책사 노릇도 수행한다.
형배 패거리 같은 범죄세력들을 제압하고 처벌해야 할 권력기관들이
불법행위를 못 본 척하거나 방조 또는 은근히 협조하는 것은
분위기를 잽싸게 파악해서는 굽실거릴 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릴 줄 아는
익현의 수완이 뛰어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경찰서에 잡혀간 익현이 호기롭게 내뱉는 “너희 서장 남천동 살제?”로 시작되는 유명한 대사가 보여주듯,
그들도 범죄세력이 제공하는 단물을 빠는 데 맛을 들였고
때로는 형배 패거리를 이용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나쁜 놈들”이기 때문이다.
검사인 범석(곽도원)은 처음에는 조금은 예외적인 인물로 보인다.
범석은 익현을 경멸하지만,
불법을 척결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검사로서 느끼는 정의감과 책임감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다.
“건달”도 못 되는 “반달”이 자신과 맞먹으려고 드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것이다.
선배인 한 변호사(송영창)와 만나는 술자리에 익현이 있는 걸 보고는 술집을 나서려 들던 그는
선배의 으름장에 못 이기는 척 돌아와 술자리에 합석한다.
<범죄와의 전쟁>의 뛰어난 점으로는 익현과 형배가 성공가도를 달리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온갖 인간 군상이 제대로 묘사된다는 걸 들 수 있다.
그 인물들은 하나같이 관객의 뇌리에 깊이 꽂히는 개성을 갖고 있고
현실세계의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것만 같은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은 각자가 맡은 배역을 맛깔나게 연기해 낸다.
이 영화가 개봉된 시점에는 아직까지는 글로벌 액션스타가 아니었던 마동석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강철주먹을 휘두르는 액션히어로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익현 때문에 엉겁결에 범죄조직에 합류해서는 어정쩡한 권력을 행사하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태권도 사범 역할을 재미있게 연기해 낸다.
자료화면에 등장하듯 그 시절에 벌어진 “범죄와의 전쟁”은
정세를 주도하지 못하면서 민심을 잃고 불리한 입장에 몰린 노태우 정권이
실정을 만회하고 우호적인 민심을 얻으려고 벌인 공작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전쟁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이권을 챙기는 데 관여하거나 동원됐던 조직폭력의 위세가 꺾이면서
고사되기 시작된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영화에서 형배 패거리가 결연을 맺었던 일본의 야쿠자도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명줄이 끊기면서,
이제 한일 양국의 “나쁜 놈들”은
이 영화에 묘사된 전성시대만큼의 위세는 부리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어디에선가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이루려는 시도는 계속 자행되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부정부패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체계화된 부정부패는 막아야 한다고,
부정부패의 싹을 완전히 뽑아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상당한 부분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대의 한국은 이 영화가 묘사한 1980년대의 한국보다는 많이 깨끗해진 사회가 됐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앞에서는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던 것에서 보듯
“나쁜 놈들”은 틈만 보이면 세력을 이뤄서는 거리를 활보하며
서민들을 위협하고 피를 빨아먹으려 들 것이라는 걸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게 된다.
그런 자들의 전성시대가 다시는 도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