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학생 지망생은 어떻게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나?

<바람>

by 윤철희

태어나는 순간부터 얻은 “짱구”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정국(정우)은

집안의 다른 식구들과 비교하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다.

아버지는 도덕 교과서에 이상적인 사례로 등장시켜도 될 법한 모범적이고 엄격한 가장이고

어머니는 식구들을 보살피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는 주부이며

형과 누나는 품행방정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다.

반면, 짱구는 모범적인 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불량학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해서든 불량학생이 되려고 안달하는 불량학생 지망생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사항일 뿐,

현실의 그는 싸움도 잘 못하는 데다 겁도 많아서

막상 몸을 써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말발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거나 힘 좋은 선배를 찾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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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한 감독의 <바람>은 불량학생이 되고 파하는 짱구가

어떻게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하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실화 기반의 사랑스러운 성장영화다.

괜찮은 어른이 된 짱구는 결국 자신의 학창 시절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을 연기하게 된다.

2009년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던 영화는

영화 전문 케이블 TV의 단골 방영작이 되면서 극장에서는 모으지 못했던 대규모 팬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들의 인지도가 올랐고

“그라믄 안 돼” 같은 몇몇 장면과 대사는 인기 좋은 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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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폭력을 일삼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15년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데에는

관객들이 주연배우 정우 자신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걸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준으로

각색하고 연출해 낸 이성한 감독의 공이 컸다.

불량 서클에 가입하는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리는 중국집 장면을 보라.

조폭 모임을 흉내 낸 자리에 참석한 멤버들이 부르는 단가(團歌)의 가사 중에는

“사회가 우리를 받아주지 않아서 영웅이 되는” 길을 택했다는 황당한 내용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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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한 감독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비행(非行)을 합리화하는 불량학생들이 일삼는 폭력과 갈취 같은

부당한 짓들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2000년대 초반에 뻔질나게 개봉되던 조폭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폭력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미화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런 행위들을 보여주기는 하되,

관객들이 거부감을 느끼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장면을 전환하거나

이후의 전개를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는 식으로 연출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바람>에는 동일한 유형의 캐릭터들을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유혈이 낭자하고 신음소리가 진동하는 잔인하고 처절한 폭력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뒤통수를 툭툭 때리고 선생님이 방망이로 학생의 엉덩이를 가격하는 체벌 수준의 폭력만 등장한다

<바람>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때리지 말라”는 짱구의 지시 때문에 얻어맞는 대신에 물어뜯긴 후배의 코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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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손호준)와 버스에서 시비가 붙은 복학생이 1대1로 싸우는 장면을 보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주위를 둘러싼 가운데 화면 양쪽에 영주와 복학생을 배치한 장면은

로마시대 검투경기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그런데 싸움꾼들이 기막히게 근사한 모습으로 주먹을 날리는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줄 것처럼 시작된 장면은

싸움에 돌입하기 무섭게 뒤엉킨 두 사람이
마구잡이로 주먹과 발을 휘두르는 우스꽝스러운 막 싸움으로 돌변한다.

그래도 1대1의 정정당당한 싸움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한 순간,

영주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복학생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다.

쓰러져있던 영주는 한 술 더 뜬다.

일어나기 무섭게 주먹만 한 돌멩이를 움켜쥐고는 몰매를 맞는 상대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가 돌멩이를 치켜드는 순간 화면은 전환된다.

이성한 감독은 이런 식의 연출을 통해 불량학생들을 무리를 지어 달려드는 데다

돌멩이까지 동원하는 비겁한 무리로 묘사하는 동시에 살짝 코믹한 분위기까지 빚어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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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주희(황정음)의 옛 남자친구를 상대로 허세를 부리다 한 방 얻어맞은 짱구의 하소연을 듣고

복수에 나선 광상 패거리들이 서면시장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이성한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장면이다.

길거리에서 어묵을 먹던 덕기(이유준)가 짱구로부터 사정을 듣고는 “가자”고 외칠 때만 해도

기껏해야 카메라에 잡힌 몇 명이 몰려가는 수준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던 장면은

리드미컬하고 웅장하게 편집한 과정을 거치면서

교복을 입은 대규모 엑스트라들이 시장 이곳저곳에서 몰려나와

100명은 족히 될 법한 패거리를 이루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그러고는 마침내 정완(지승현)이 선두에 등장해 상대 패거리의 우두머리와 대면할 때쯤에는

한국영화에 나오는 이런 종류의 장면들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법한 인상적인 장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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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장면이 많다는 것은

이 영화를 긴 세월 동안 사랑받는 영화로 만들어준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점심때 보자는 정완의 지시를 까먹고는 라면을 먹은 짱구가

그 일 때문에 소집된 무거운 분위기의 회합 자리에서

엉겁결에 라면 먹느라 모임에 못 갔다는 말을 내뱉어 매를 버는 코믹한 장면도 그런 장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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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짱구가 개과천선하는 계기가 되는

짱구 아버지(조영진)의 간 질환 발병 이후에 나온다.

복수(腹水) 때문에 배가 만삭 임신부의 배처럼 볼록해진 아버지는

집에 도착하고서도 계단을 오르지 못한다.

싸움실력을 키우려고 헬스장을 열심히 다니며 힘과 근육을 키워온 짱구는

아버지를 번쩍 안아 들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영화는 짱구가 아버지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그러니까 이제 짱구는 아버지를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성장했으니

남은 것은 “정신적인 성장”일뿐이라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을 부감으로 보여준다.

화면에는 아버지의 흐뭇해하는 목소리가 깔린다.

“우리 막내, 힘이 좋네, 힘이 좋아.”

짱구의 힘을 칭찬하는 이 목소리는 영화에서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짱구에게 한 유일한 칭찬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얘기처럼,

아버지의 칭찬은 짱구를 자극하면서

짱구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나마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그 결과, 실제 가족의 사진이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스크린에 뜰 때

우리는 짱구의 성장을 기특하게 여기면서 아버지가 지었을 법한 미소를 저절로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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