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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n 06. 2024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면들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2000년 영화 <플란다스의 개>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나는 사람들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지금은 세계적인 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이

4 반세기쯤 전에 만든 이 영화를,

<살인의 추억>이나 <기생충>이 아니라

이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정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에는

신인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패기와 열정도 보였지만

과욕과 미숙함 같은 것들도 보였다.

봉준호 감독은

주인공 윤주를 연기하는 이성재 배우와

윤주의 선배를 연기하는 임상수 감독이

화장실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줌 인 트랙 아웃(아니, 줌 아웃 트랙 인인가?) 기법으로 찍었다.



신인감독 봉준호가

구현하기가 꽤나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진

그 기법으로

무슨 효과를 얻으려고 했는지 의문이다.

지금의 봉준호 감독에게

그 장면을 다시 찍으라고 하면

이번에도 여전히 그 기법을 쓸까?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아닐 것 같다.


아직은 반려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지 않던 시절,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없어서

인명사고가 간간이 발생하던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타임캡슐 같은 영화 <플란다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로 일하는

현남(배두나)의 추격전 장면들이다.


영화에는 추격전이 두 번(관점에 따라서는 세 번) 나온다.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핀잔이나 듣고

무시받으면서 사는 게 지루하기만 한,

착하지만 맹하기도 한 현남은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서

어떤 남자가 개를 떨어뜨려 죽이는 걸 목격한다.

현남이 짜릿한 삶의 활력소를 찾아낸 순간이다.

현남은 범인을 잡으려고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를 질주한다.


요즘에는 이 장면을 스테디캠과 드론과 CG를 이용해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역동적인 장면으로 연출해 내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대체하기 시작하던 무렵인 그 시절에

이렇게 빼어난 질주 장면을 찍으려면

시간과 품과 비용을 많이 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얻은 속도감 넘치는 장면 사이사이에

슬로모션을 편집해 넣는 것으로

화면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추격의 대상이 된 현남


현남은 두 번째 추격전에서는 추격의 대상이 된다.

현남이 노숙자에게 잡혀 먹일 위기에 몰린 개를 구하기로 결심하고는

후드의 끈을 조이는 순간,

주변 아파트의 옥상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응원하는 환상장면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온 세상이 현남을 응원한다.


현남은 용기를 한껏 끌어내 벌인 이 추격전의 결과로

소소한 영웅적 성과를 얻어내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그녀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플란다스의 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세작인 <살인의 추억>에도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논에서 하는 현장검증 장면이나 터널 엔딩 신처럼

사람들이 많이 주목하고 거론하는 장면은 아니다.



경찰이 인지 못한 살인사건이 있을 거라 주장하는 김상경이

전경들을 동원해 실종된 미모의 아가씨를 찾아 갈대밭을 수색하는 동안

송강호와 김뢰하는 옆에서 한가로이 실뜨기를 하며 실없는 수다를 떤다.

김뢰하가 실종된 아가씨는 “이 동네에서 썩기는 아까운 애”라고 말하는 순간,

갈대밭에서 썩고 있는 아가씨의 시체가 발견된다.

정말로 영리하게 집필된 장면이다.


이 장면은 봉준호 영화의 일관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봉준호 영화의 특징

영화의 캐릭터들이 일상적으로 보거나 지나치면서도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공간의 바로 아래에

그들이 찾아 헤매거나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갈대밭과 길가 하수관에서 발견되는 시체,

<괴물>의 한강,

<마더>의 항아리에 담긴 쌀 아래에 감춰진 휴대폰,

<설국열차>의 객차 아래에 있는 존재 등을 생각해 보라.


<플란다스의 개>에는 20년쯤 뒤에 나올 <기생충>을 예고하는 공간이 나온다.


러닝머신이 놓여있고

세계 여러 도시의 현지 시각을 보여주는 시계들이 설치된

<플란다스>의 아파트 지하공간은

20년쯤 뒤에 만들어질 <기생충>을 예고하는 듯하다.


<플란다스>를 다시 보면서

시나리오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전개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영화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반려견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개와 윤주의 관계는 그때마다 변한다.

그런 관계의 변화를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이

이 시나리오의 인상적인 점이다.


윤주는 영화에서 두 가지 죄를 저지른다.

두 번째 죄를 저지른 밤,

만취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첫 번째 죄를 현남에게 고백하려 하지만

맹한 성격으로 초지일관하는 현남은 윤주가 하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윤주는 그가 저지른 두 가지 죄에 대한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가게 된다.


<플란다스의 개>가 개봉된 20세기말, 21세기 초는

한국영화가 기나긴 침체기에서 벗어나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시기다.

이 영화를 전후해 만들어진,

영화에도 등장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열었고

구멍가게 수준으로 운영되던 한국 영화산업은

비로소 제대로 된 산업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극에 달한 산업화는

수익성만을 좇는 제작자와 투자자를 양산하는 한편,

다른 여러 요인과 맞물리면서 한국영화를 새로운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는

교수 사회의 비리 등을 고발하는 사회 고발물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공포영화의 요소와 반려견 연쇄 실종사건의 범인을 쫓는 추격전까지 보여주지만

장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힘든 영화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에

어떤 전도유망한 감독이 이런 시나리오를 데뷔작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투자자를 찾아 돌아다닌다고 쳐보자.

그 시절에도 흥행에 실패했던 이 영화를

요즘에 이 정도 제작비를 들여 제작하겠다고 나설 투자자가 있을까?

이 영화를 회원들에게 서비스하는 넷플릭스조차 이 시나리오를 받으면 고개를 젓지 않을까?


<플란다스의 개>는 딱 그 시절이 낳은 영화다.

“영화예술”에 대한 이상을 품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흥행”이라는 현실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겨낼 수 있었던 시대가 낳은 영화다.


현남의 첫 추격전은 어이없는 사건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봉준호의 경력은 현남처럼 시작됐지만 이후로는 현남과 다른 길을 달려왔다.

첫 영화가 실패했더라도 가능성을 인정받으면 따뜻한 격려를 받으면서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은 봉준호는

현남처럼 후드의 끈을 바짝 조이며 절치부심하고는 성공가도를 질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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