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철희 Sep 25. 2024

"100엔짜리 여자"가 권투를 하는 이유

<백엔의 사랑>(그리고 <맵고 뜨겁게> 약간)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불우한 현실을 이겨내는 수단으로 권투를 선택한 주인공이

자기한테 그런 게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발견한 천부적인 재능 덕에,

또는 이 악물고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끝에 얻은 실력으로

챔피언에 오르는 결말이나

챔피언 등극에는 실패하지만

뭔가 소중한 교훈을 얻는 결말을 택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표적인 권투영화라 할

<록키>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주먹이 운다> 같은 영화들을 생각해 보라.

주인공이 상대를 두들겨 패고 상대에게 얻어맞을 때 느껴지는 쾌감 때문에

권투를 하는 것 같은 <분노의 주먹>은 예외로 치고.



타케 마사하루(武正晴) 감독이 연출한

<백엔의 사랑>의 주인공 이치코가 권투를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주인공들하고는 다르다.

이치코가 연습하는 체육관의 높은 곳에

“Hungry”와 “Angry”라는 단어가 걸려있기는 하지만,

<백엔의 사랑>은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이치코가

악착같이 권투를 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100엔짜리 여자”라고 생각하는 이치코는

데뷔전을 치른 뒤에도 계속 100엔짜리 세계에 머무른다.


권투영화의 클리셰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백엔의 사랑>을 보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치코가 권투로 성공하는 걸 보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만,

<백엔의 사랑>은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면서 수작(秀作)이 된 영화다.

아다치 신(足立紳)의 시나리오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이치코가 엉겁결에 권투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는 권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게

밝혀질 거라고 예상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권투선수로서 재능도 없고 생활력은 더더욱 없지만

앓아누운 이치코를 정성껏 간호해 주는 남자친구가

이치코의 훈련을 도와 성공하게 만들 거라 예상하지만

영화는 이치코를 배신하는 남자친구처럼 우리를 배신한다.



서른 살을 한참 넘기고도 무위도식하는 이치코와

대판 싸우고 소원해진 가족들이

권투에 입문한 이치코의 진심에 감동해서는

이치코를 열렬히 응원할 거라고 예상하는 관객은

이번에도 뒤통수를 맞는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도시락집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링에 오른

이치코의 경기를 보러 온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이치코의 모습에 넋을 잃을 뿐이다

그래도 여동생은 눈물을 흘리기는 한다).


“아무리 그래도 체육관 관장은

이치코를 기특해하며 격려해 줄 거야”라고 생각한

관객의 예상도 크게 빗나간다.

재미있는 캐릭터인 관장은

경기를 뛰고 싶다는 이치코를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다,” “주먹을 맞으면 아프다” 등등의 다양한 핑계를 대며

이치코의 의욕을 꺾어놓으려 애쓰기만 한다

그래도 경기가 끝난 뒤에는 “좋은 경기였다”라고 말하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치코는 왜 권투를 하는 걸까?

그 이유는 장본인인 이치코조차도 똑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에 이치코가 험한 일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치코가 호신술로 권투를 배우는 건 아니다.

편의점 상사에게 주먹을 날리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패주려고 권투를 배우는 것도 아니다.

영화 오프닝에서 조카를 데리고 권투 게임을 했던 걸 보면

이치코는 원래부터 권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경기가 끝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싸우던 상대의 등을 두드려주는 게

멋있어 보여서 자기도 그렇게 해보려고 권투를 하는 것 같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백엔의 사랑>이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일 뿐

권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백엔의 사랑>은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던 여자가,

100엔짜리 물건들을 파는 데 주력하는 편의점에 취직한 뒤에야

“자신은 100엔짜리 여자”라는 걸 깨달은 여자가

잠깐일지라도 그런 삶에서 벗어나 멋져 보이는 삶을 살아보려 애쓴 뒤에

다시 그 세계로 돌아오는 내용을 다룬 영화다.


“100엔짜리 여자”의 삶이 화려할 일은 없다.

그렇기에 <백엔의 사랑>은 권투장면도

앞서 언급한 영화들처럼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전개나

상대를 강타하는 주먹의 충격을 과장해서 관객의 피를 끓게 만드는 식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권투장면은 영화에 두 번 등장하는데,

이치코가 권투 하는 장면은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온다.

공들여 연출한 장면이지만 멋있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영화는 안쓰러울 정도로 얻어터지는 이치코를 보여준다.

중간에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거나 다름없는 이치코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경기에서 패배한 이치코는

비틀거리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상대를 포옹하고는

어깨를 두드려주는 멋진 일을 하는 데 성공한다.

승패야 어쨌든 멋진 일을 하기는 한 것이다.


<백엔의 사랑>은 시나리오도 좋고,

욕심부리지 않고 불필요한 기교를 시도하지도 않는 연출도 좋은 영화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이치코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安藤サクラ)의 “무시무시한 연기력”이 있기에

좋은 영화가 된 영화다.

<백엔의 사랑>에서 안도 사쿠라가 펼친 연기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런 의문이 든다.

“<백엔의 사랑>은 안도 사쿠라가 1인 2역을 맡은 영화인가,

아니면 두 명의 배우가 이치코라는 하나의 역할을 연기한,

그러니까 2인 1역을 통해 완성된 연기한 영화인가?”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권투를 하기 전의 이치코와

본격적으로 권투를 시작한 이치코는

확연하게 인상이 다른 존재들이다.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말도 행동도 느릿하고 자신감이 없는 이치코와

도망가는 남자친구를 달리기로 따라잡는 이치코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내가 <백엔의 사랑>에서 좋아하는 장면은 이치코가 변신을 시작하는 장면,

그러니까 이치코가 동네에서 훈련하는 장면이다.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다시 보니 무척이나 짧아서 당황했던 장면이다.

아마도 화면 구도와 편집의 리듬감, 경쾌한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인상에 깊이 새겨진 까닭에 그렇게 기억에 남은 게 아닌가 싶다.


권투선수가 훈련하는 장면의 클래식이라면 흥겨운

“Gonna Fly Now”가 깔리는 가운데

록키가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록키>의 대표적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백엔의 사랑>에서 이치코가 뛰는 장소는 그런 명소가 아니다.

이치코는 작은 동네의 좁은 골목길과 하천변을 뛴다.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간이자

그녀가 살아가는 공간을 뛰어다닌다.

훈련장소조차 그런 곳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백엔의 사랑>의 정체성이자 장점이다.

이치코는 권투를 하기 전이나 후나 계속 “100엔짜리 여자”일 테지만

<백엔의 사랑>은 결코 그렇게 저렴한 영화가 아니다.



덧붙이는 말 1.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가 “19금” 등급을 받는 건 드문 일인데,

<백엔의 사랑>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딱 한 장면 때문인데,

그 장면을 그런 식으로 연출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장면을

굳이 그렇게 연출하고 영화에 집어넣었어야 하나?

넷플릭스에 공개된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도

역시 별 것도 아닌 딱 한 장면 때문에 “19금”을 받았었다.

일본영화와 드라마 제작진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궁금하다.



덧붙이는 말 2.

이 영화의 중국 리메이크 <맵고 뜨겁게>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자링 감독이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이치코 역할을 연기하기까지 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서는 좋은 재료와 레시피를 가져다 프랜차이즈 음식을,

그것도 중국인들 입맛만 고려한 프랜차이즈 음식을

만들어낸 것만 같은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중국인들 입맛을 제대로 저격한 덕인지

중국에서는 흥행에 성공했다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다.


코미디로 방향을 틀어서가 아니다.

메이킹 필름으로 따로 공개했어야 할 내용을

영화 본편에 집어넣은 것 때문에 그렇다.

체중을 불렸다 줄이느라 고생했으니

관객들도 그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딱 생각의 영역에서 멈췄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우리나라에서도 <백엔의 사랑> 리메이크 판권을 샀다는데

<맵고 뜨겁게>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순식간, 찰나, 잠깐, 그리고 영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