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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20년간 했던 촬영 중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촬영은 어떤 거였나요?”
이사칠이 화성행이 결정되기 전에 받은 이 질문에
“힘들지 않은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었다”고 대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작품은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작되는데,
사람들의 욕망은 정말로 다양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욕망의 개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와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떤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는
세상의 숱하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작품이 겨냥한 일부 사람들이 가진 공통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노력해야 하는데,
그 욕망은 그걸 충족시키려 애쓰는 배우들에게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을 안겨준다.
포르노가 그려내는 세계는 이상한 세계다.
이 세계의 치어리더는 전반전을 부진하게 보내고는 휴식시간을 맞은 선수의
딱딱한 근육을 풀어주고 투지를 불어넣겠다면서 이상한 방법을 동원한다.
이 세계의 의사와 간호사는 병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안타깝다며
예상치 못한 치료방법을 쓰고,
교사와 학생은 범상치 않은 방법으로 학습동기를 부여해 성적을 끌어올리려 한다.
백설공주는 누구 하나 편애하는 일 없이 일곱 명의 난쟁이에게 고루고루 사랑을 베풀고,
좀도둑질을 하다 걸리거나 택시비가 없어 곤란한 여성들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을 써서 곤궁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이상한 세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상상만 할뿐 절대로 시도하지는 못할 기상천외한 상황에서 하는 섹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존재하기에 특이한 작품들이 기획되고 제작된다.
그런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스쿠버 장비를 달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며 놀이동산에서 운영하는 범퍼 카에 오른다.
이사칠은 불과 몇 미터 옆에서 용암이 부글거리며 흘러내리고
유황 냄새가 매캐한 화산 분화구에서 촬영한 적도 있었다.
그때 화상과 질식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공연한 배우가 그레이스였다.
이런 작품을 촬영할 때는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와
그에 따른 소송의 위험을 피하려고 사전에 안전장치를 충분히 설치하지만,
안전장치는 어디까지나 안전을 위한 장치이지 편안함을 위한 장치는 아니기 때문에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갖가지 불편과 고단함을 감수해야 한다.
촬영이 얼마나 힘든지 탈진하는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사칠과 그레이스는
“목숨을 위협하는 용암과 가스 앞에서도 섹스를 통해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인류의 위대함을 보여준다”는 제작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용감하게 연기에 몰입했었다.
그래도 한 작품을 꼽아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이사칠은 윤활제 장르를 꼽았다.
역시 이유를 모르겠는데,
세상에는 윤활제로 범벅이 된 배우들이 번들거리는 몸으로
미끌거리는 상대의 몸을 악착같이 부둥켜안고 격한 사랑을 나누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겨냥한 작품을 만들어도 수지타산이 맞을 정도 규모로 존재한다.
그런데 윤활제 장르는 작품 판매 수익만을 노리고 제작되는 건 아니다.
윤활제 장르가 꾸준히 만들어지는 건
윤활제 제조업체가 제작비 일부를 쏠쏠하게 지원하고
제작에 사용되는 윤활제를 무한정 제공하기 때문이다.
윤활제 장르의 제작자는 작품을 만들기도 전에 제작비 일부를 안전하게 회수하는 셈이다.
그런데 윤활제 장르가 제공하는 안전망은 어디까지나 수익을 보호하는 차원의 것이지
거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윤활제 장르에서 연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사칠만이 아니라 모든 배우가 이 장르를 어려워한다.
바닥이 미끄러워 중심을 잡기 어렵고
넘어지는 경우에도 파트너가 붙잡아주기 어렵기 때문에,
심하면 붙잡아주려던 파트너까지 같이 넘어지기 때문에
허리를 다치거나 골절을 당하는 등의 부상 위험도 크다.
이사칠도 팔이 부러질 뻔한 적이 있었다.
남녀 배우가 다 부상을 당하고
그중 남자배우는 허리를 다쳐 은퇴를 고려하는 지경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상당한 액수의 제작비가 사전에 회수되니
그런 장르가 만들어지고 누군가는 그 작품에 출연해 연기를 해야 한다.
묘한 건,
이렇게 애를 먹이는 윤활제 장르에 출연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 배우가 품에서 미끄러져나갈 때 나는 특이한 소리와 미끈한 감촉,
상대를 어떻게든 붙들려고 한껏 힘을 준 팔다리의 근육들이 부대낄 때
온몸을 관통하는 야릇한 기분에는 강력한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작품을 끝내면 다시는 윤활제 장르를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하고서도
막상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길이 없는 쾌감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홀린 듯이 계약서에 서명하고는 했다.
윤활제 장르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상황에서 연기해온 이사칠이었지만
지금 그가 처한 미소중력보다 어려운 촬영 환경은 없었다.
미소중력에서 하는 촬영은 윤활제 장르의 촬영 난도보다
한 차원, 아니 두 차원 더 어려운 여건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윤활제 장르를 찍을 때는 바닥도 미끄럽고 상대의 몸도 미끄러운 탓에
눕는 것 이외의 다른 자세는 취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몸을 놀릴 수 있게 굳건히 받쳐주는 바닥이 존재하는 윤활제 장르와 달리,
우주정거장에는 들썩거리는 몸을 받쳐주는 받침대 노릇을 해주는 게 없다.
선실 벽에 상대를 몰아붙이면 될 것 같지만,
바닥에 붙인 몸을 중력이 끌어당기면서 고정시켜주는 지상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선실 벽을 바닥으로 삼은 사람의 몸에 어떤 식으로건 힘을 가하면
상대의 몸이 그 힘에 밀려 크게 이동하기 때문에
섹스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인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갖가지 색깔의 빛을 뿜어내는 별들과 어우러지면서 하는 우주 공간의 섹스는
상상하기에는 한없이 낭만적이고 몽환적으로 보이겠지만,
그걸 실행할 때 따르는 어려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미소중력 섹스는 날개 달린 천사들이나 할 법한 섹스다.
수중에서 하는 섹스라고,
나아가 몸놀림을 어렵게 만드는 물의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섹스라고 봐야 한다.
동서남북을 구분할 길도 없고 구분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곳에서 하는 섹스라고,
위와 아래를 구분할 길이 없기에 여성상위와 남성상위의 구분이 무의미한 섹스라고 봐야 한다.
수십만 년 동안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섹스하는 법을 터득하고는
그걸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아온 지상의 생명체에게
“남성상위”와 “여성상위” 같은 것들의 의미가 전혀 없는 미소중력 상황은
생식본능에 따른 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이사칠이 ‘미소중력 섹스’를 구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린 비주얼을,
즉 한데 엉킨 남녀가 선실 한가운데에 둥둥 뜬 채로 사랑을 나누는 비주얼을
실제 화면으로 구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려면 시청자들의 눈을 속이는 비책이,
그리고 미소중력이라는 생소한 환경에서도 원하는 동작을 안정적으로 취할 수 있도록
몸을 길들이는 숱한 훈련과 리허설이 필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