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화성인 247>

★ 23 ★

by 윤철희

“미리 말해두는데요, 이 방송에서 남친 얘기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남친과 관련한 질문은 보내지 말아요. 뉴스 링크도 보내지 말고요.


“우리, 이름 얘기나 해요.”

그레이스는 커서를 ‘예명’에 올려놓았다.

“‘그레이스 오’라는 예명은 이사칠이 한 달간 고심한 뒤에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한 달? 두 달 정도 걸리지 않았나?

오빠 찾아간 게 18살 생일 두 달쯤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오빠가 내 예명 때문에 고민을 정말로 많이 했어요.


“오빠 말로는,

‘그레이스’를 선택한 건 20세기에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여자분들이

영어 이름을 ‘그레이스’로 짓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대요.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써서 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잊지 말고

팬들에게도 그 사실을 자랑스레 알리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내린 은총’ 같은 존재가 되라는 뜻이니까 나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원래 성(姓)은 김씨인데, ‘오(Oh)’를 성으로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기쁠 때나 즐거울 때 내뱉는 탄성처럼 들리니까 이것보다 제격일 수가 없겠더라고요.

외국인들이 발음하기도 쉽고. 내 예명 그레이스 오는 그렇게 정해졌어요.”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고 커서를 조작해 다음 꼭지로 넘어간 그레이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내 페이지에는 왜 학교 얘기가 없어요?

오빠 페이지에는 꽤 길게 있더만.

내가 오빠처럼 대학교, 대학원은커녕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중퇴해서 그런가?

그래서 할 얘기가 없는 건가?

근데요, 여러분,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을 거 같죠?

아니에요. 나, 그렇게 머리 나쁜 애 아니에요.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는데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어요.

체육도 잘했고 미술도 잘했어요. 수학도 잘했고요.

에밀리 언니만큼은 못했지만, 그래도 에밀리 언니는 의사니까...”

그레이스는 에밀리를 두 번이나 언급하고 나서야

에밀리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커서를 내려 다음 꼭지들로 넘어갔다.


“‘출연작’이니 ‘수상경력’이니 이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런데 수상경력을 보니까 빠진 게 서너 개 있는 것 같네요.

채워주세요. 그런 게 다, 내가 인정받는 배우였다는 걸 보여주는 건데 빠져있으면 섭하죠.

‘여담’으로 가볼까요? 하, 여기도 남자 얘기가 많네요.

읽기는 싫고, 그래도 무슨 내용이 있나 잠깐 볼게요.”

그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태블릿에 집중했다.

“여기요, 이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체포된 적이 있고 그 중 몇 건은 마약 관련이라고 돼있는데,

나는 무슨 문제로건 체포된 적이 없어요.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체포될 뻔한 적은 몇 번 있지만요.

그리고 저는 마약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이사칠 오빠하고 데뷔할 때 약속한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요, 이 바닥에는 약이 흔해요.

일하면서 겪은 배우들 중에 마약에 손을 대는 배우들이 많아요.

약 때문에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많고요.

약이 아니면 버티지를 못해서 약을 하고

약을 구할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하는 악순환에 빠진 사람이 많아요.

그런 모습을 지겹도록 보면서 오빠가 왜 그런 약속을 하라고 했는지 이해했고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약 얘기, 체포 얘기, 이거 고쳐주세요.


“포르노배우가 되려는 한국인 여성에게 보낸 공개 메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내가 그런 메일을 보냈었다고요?

흐음, 그런 적이 있었나? 어디 한 번 볼까요?”

그레이스가 문장 끝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자 별도의 창이 떴다.

메일의 내용이 옮겨져 있었고,

중요한 부분은 볼드 효과를 주고 밑줄을 긋는 식으로 강조돼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강조된 부분만 읽었다.


“당신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내가 생각하는 포르노배우의 현실을 솔직하게 알려주고 싶어요...

포르노에 출연하는 게 어떤 거냐면,

생전 처음 가는 도시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생전 처음 보는 배우하고 섹스하는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그 영상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세상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죽은 뒤에도 마우스를 클릭해서 그 영상을 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주위사람들이, 특히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내가 제일 부러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이 일을 하면서도 가족의 응원을 받는 사람이에요.

데뷔한 후로 사랑하는 엄마와 의붓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솔직히, 보고는 싶은데 차마 보러 갈 염치가 없어요.

나를 보고도 외면하거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것만 같아서 무서워요.

지난 몇 년간 내 곁을 지킨 건 뻔질나게 얼굴이 바뀌는 남자들이었어요.

내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이럴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 인생은 이렇지 않기를 바라요...


“... 포르노를 찍는 게 쉬운 일로 보이죠?

남자는 계속 힘을 써야 하지만 여자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아요. 여자도 힘들어요.

알몸으로 예민한 부위에 자극을 받으면서 몇 시간씩 촬영하는 건

육체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영상만 보면 촬영이 매끈하게 이뤄지고 엉뚱한 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다 편집이 돼서 그런 거예요.

촬영 시작하고 3분에서 5분 정도 지나면 촬영이 중단돼요.

무슨 문제가 생겨서 그럴 수도 있고

해당 장면의 홍보용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소리를 질러가며 열심히 촬영하던 중에 흐름이 딱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몸도 식고 마음도 식은 썰렁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촬영을 시작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도 느끼고 상대 배우도, 팬도 느끼게 만들어야 해요.

그런 식으로 몸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갈까요, 안 갈까요?

오르가슴을 느끼면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거예요.

나도 데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바닥에도 대본이라는 게 있어요.

오르가슴을 느끼는 동안에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대사를 쳐야 하는지 정해놓은 대본이요.

뿅 가는 와중에도 보는 사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 의도로 작성된 대사를

무의식중에 내뱉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해야 하는 거예요.

어머, 이건 내가 지금 버지니아한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는 잔소리인데,

옛날에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네.”


그레이스는 나중에 손 벌릴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려는 심산으로

버지니아의 이름을 언급해 동영상에 영원히 박제했다.


“사람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도 굉장히 커요.

이 바닥에는 개망나니 같은 놈들이 많아요.

출연료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런 놈들하고 몸 비비고 섞으면서 하루 종일 지내는 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 줄 알아요?

나나 다른 배우들이 이사칠 오빠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오빠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같이 깍듯하게, 상냥하게 대하니까요.

그래서 오빠랑 많은 작품을 찍은 거예요.

오빠랑 찍으면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고,

그놈의 완벽주의 때문에 이것저것 시키는 게 많아서

몸은 힘들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너무너무 편하니까요.


“... 현실하고 환상도 잘 구분해야 해요.

쉽게 말하면,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몸을 섞었다고 마음까지 섞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솔직히 나도 이 문제 때문에 고생을 좀 했어요.”

그레이스는 다시 버지니아를 언급했다.

“버지니아가 묻더라고요. 언니는 공연한 배우한테 진짜로 빠진 적이 있느냐고.

데뷔 초에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을 제대로 깨달았어요.

사람들이 이사칠 오빠하고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개인적인 감정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묻는데요,

다시 말하지만 오빠하고 나는 정말로 프로페셔널한 관계예요.

카메라가 꺼져도 여전히 다정하게 지내지만

그때 감정은 남매 사이에 느끼는 다정함이에요.”


“... 언젠가 오빠가 한 말이 있어요.

사람들이 ‘이사칠 정신’이라고 말하는 얘기가 있죠?

지금 내가 하는 말도 거기에 넣어도 돼요.

‘돈에 연연하지 않으면 돈을 벌게 된다.’

작품이 들어오면 출연료를 생각할 게 아니라 작품을 생각하라는 말이었어요.

출연하기로 했으면 감독이 그 작품으로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감독이 가진 비전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라는 말이었어요.

자기는 창작하는 아티스트라는, 퍼포머(performer)라는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하다 보면

인기도 얻게 되고 출연료도 많이 받게 될 거라는 말이었어요.

나는 오빠가 해준 이 말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어요.

당신도 만약에 이 길을 택할 거라면 이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흐음... 이 생각은 지금도 여전해요.

그러니까 별의별 고생 다하면서 여기 우주까지 온 거

거추장스러운 옷 입어가면서 열심히 리허설을 하는 거죠.

이번 생방송이 이사칠 오빠가 정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이라는 거 다들 알죠?

저는 오빠의 원대한 비전을 실현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게 된 걸

정말로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모두들 모레 있을 방송에 관심 많이 갖고 기대 많이 해줘요.

주위에 아직 시청 신청을 안 한 사람이 있으면 꼭 신청하라고 설득하고요.

그럼 모레 봐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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