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247> ★ 22 ★
“내 인생을 정리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요? 뭐 대단한 인생이라고?
오빠야 화성으로 가니까 그런다지만 나는 화성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해 어떻게 적어놨는지도 알고 싶지 않아요.
그거 알아서 뭐하게?
자기들 멋대로 적어놨을 거잖아.
거기다 케빈 얘기랑 다른 놈들 얘기도 나올 거고.
싫어요.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오빠?”
슈퍼카를 몰고 사라진 케빈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사고를 친 것이다.
케빈은 슈퍼카를 몰고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
다행히 사상자는 나오지 않은 이 사건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면서
이사칠에게 씁쓸함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줬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피를 양껏 빨아먹다 등을 돌린 남자들을 겪을 때마다 늘 그랬듯
케빈이 도망친 시점부터 케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그 인간이 적어도 생방송 홍보에 도움이 되는 짓은 했네요”라고 이사칠에게 말했지만
카메라 앞이 됐든 밖이 됐든 놈과 관련된 얘기를 하는 건 원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레이스는 옛날얘기를 다시 해서 뭐하냐며
자기 인생을 정리한 글을 읽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스킨수트를 입고
방송 시작 30분 전에 카메라 앞의 허공에 자리 잡고는 열심히 방송 준비를 한 건
〈너바나〉 홍보를 위한 이벤트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직업윤리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메라 앞에 자리 잡은 그레이스의 얼굴은
최근 2, 3년간 보여준 섹시한 얼굴보다는 데뷔 초에 보여주던 청순한 얼굴에 더 가까웠다.
메이크업 효과 덕이었다.
그레이스는 평소에도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아 공부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은퇴하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할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이사칠과 함께 우주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레이스가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이
“우주에서는 메이크업을 어떻게 하지?”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메이크업이 포르노 제작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의상보다 큰 건 분명하다.
비주얼 면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것은 아니다.
은밀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려서 보는 사람을 감질나게 하거나
그 부위만 돋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섹시한 의상과
곧 벗겨지거나 찢겨지면서 나름의 소임을 다하고 사라질 의상의 비중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국 포르노는 의상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살갗을 보여주는 장르이기에
포르노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살갗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할 바가 아니다.
관객을 흥분시키려면 피부의 색감과 질감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푸석푸석하고 칙칙한 느낌을 풍기는 배우의 알몸을 보고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울 시청자가 있을까?
그런 느낌의 피부를 보면
금방이라도 용암을 분출시킬 듯 부글거리는 화산 분화구도 싸늘하게 식어버릴 것이다.
사랑스러운 기운과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탱글탱글한 피부와
번들거리는 질감을 풍기는 땀은
시청자의 뇌를 강하게 자극해 흥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이사칠은 메이크업과 관련해서는 평소에도 그레이스와 많이 상의하는 편이었다.
이사칠이 이번 여행에 어떻게든 그레이스를 데려가려고 열심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다.
여행의 특성상 메이크업만 전담하는 아티스트를 대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레이스는 배우로 출연하는 동시에
우주정거장이라는 촬영 환경에 어울리는 메이크업을 연구하고 작업해줄 인재였기 때문이다.
우주에서는 분가루가 날리는 화장품이나
장비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을지도 모르는 점성(粘性) 있는 화장품을 쓸 수가 없다.
우주정거장을 빼곡하게 채운 첨단장비들의 작동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사칠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그레이스는
메이크업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파우더와 점성 있는 물질을 쓰지 않는 최소한의 메이크업으로
이사칠이 원하는 효과를 얻어낼 비법을 찾아냈다.
그레이스의 이미지가 과한 메이크업으로 빚어낸 최근의 섹시한 이미지 대신
지금의 청초한 이미지가 된 것은 그 비법이 성공적으로 적용된 결과였다.
그레이스는 그녀가 고안해낸 비법이 우주에서 제대로 먹혀드는 게 확인됐으니
지구에 돌아가면 특허를 내라는 이사칠의 조언을 듣고는 굉장히 기뻐했다.
그레이스는 장차 우주 개척시대가 열리면 우주에 올 여성들이 많아질 텐데
우주에서도 화장 본능을 잃지 않은 여성들이
자신의 비법에 따라 생산된 제품을 구입해 외모를 꾸밀 거라는 예상에,
지구를 떠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우주에서 쓰는 화장품은 어떨지 확인해보려고
화장품을 구입할 사람도 많을 거라는 예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물위키의 ‘그레이스 오’ 항목은 ‘이사칠’ 항목에 비하면 굉장히 짧았다.
포르노배우로서 그레이스의 한국 내 인지도는 꽤나 높은 편이었다.
연기 중에 본능적으로 내뱉는 척하면서 틈틈이 한국어로 구사하는
“오빠” 같은 교성에 흥분하는 한국 남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만든 야한 동영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한국어가
한국 남성들에게 먹혀 들 거라는 그레이스의 짐작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렇지만 ‘이사칠 운동’과 관련된 발언을 많이 하는데다
포르노배우로 데뷔하려는 한국인들을 위한 브로커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는
이사칠의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그레이스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인지도는 이사칠의 그것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물위키에 게재된 그레이스의 정보량이 적은 데에는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 밝히는 걸 꺼리는 그레이스의 성향도,
그래서 공개된 정보가 많지 않은 현실도 반영돼있었다.
평소 잘 착용하지 않는 안경을 낀 그레이스는
시청자에게 인사하면서 방송을 시작한 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태블릿에 뜬 정보를 읽어나갔다.
“한국 출신의 미국인 포르노배우. 서울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머니와 살다가
어머니가 미국인과 재혼한 후 11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17살 때 남자친구와 동거하겠다며 가출한 후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날 포르노에 데뷔했다.
한국 출신의 미국인 포르노배우 이사칠과 인연이 깊은데,
그녀가 포르노에 데뷔하는 데 도움을 주고 데뷔작에서 공연하기도 한 이사칠은
이후로도 많은 작품에서 공연했다.
이사칠과 인연은 그레이스 오가 이사칠의 우주여행에 동행하면서
인류 최초로 우주에서 송출하는 성인용 콘텐츠 생방송에서 공연(예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게재된 글에 등장하는 ‘이사칠’이라는 단어에는 모두 하이퍼링크가 걸려있었다.
“맞아요. 이사칠 오빠하고는 인연이 깊어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 ‘가출’이라는 데에
미국인 아버지에게서 오랫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주(註)가 달려있는데요,
이건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어요.
의붓아버지는 나한테 이상한 짓 한 적 없어요.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친아버지보다 잘해줬으면 잘해줬지 몹쓸 짓을 한 적은 없어요.
우리 식구는 정말로 화목하게 살았어요.
그분은 이런 식의 비난과 모욕을 당할 분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거 지워주세요. 제가 집을 나온 건 그냥 내가 남자랑 섹스에 미쳐서...”
그레이스는 한숨을 쉬고는 커서를 조작해 ‘남자친구’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별도의 창이 열리면서
사고를 치고는 상황을 수습할 돈이 필요했던 남자친구가
협박에 가까운 권유를 하는 바람에 포르노에 데뷔했다는 설이 있다는 내용이 떴다.
그걸 읽은 그레이스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그랬었나?” 혼잣말을 했다.
“흐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남친이...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요. 기억하면 또 뭐하겠어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그레이스는 말을 멈추고 3초 정도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아니다.
우리, 내가 그 사람한테 줄 돈을 마련하려고 포르노에 데뷔한 건 사실이 아닌 걸로 해요.
지금 와서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 사람이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보는 포르노에 언젠가부터 이사칠이라는 한국인 배우가 자주 나오는데
한국 사람인 내가 그 사람하고 하는 걸 보면 기분이 끝내줄 것 같다고요.
그 인간은 내가 다른 사람이랑 섹스하는 걸 보고 좋아하는 성향이었어요.
그런데 이왕 그렇게 촬영할 거면 아예 배우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섹스가 좋은데,
포르노배우가 되면 섹스를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들하고 섹스를 하는데다 돈까지 받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사칠 오빠한테 연락해서 상의했어요.
배우로 데뷔하고 싶다고요.
여러분,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데뷔한 걸로 해요. 섹스가 좋아서요.
내가 무슨 이유로 데뷔를 했든, 포르노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