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화성인 247>

★ 24 ★

by 윤철희

이사칠은 마지막 리허설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평소보다 훨씬 긴장된 그레이스의 근육과 표정을 접할 때마다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면서 위안으로 삼을 점이 있다면

에밀리가 두 사람의 몸 곳곳에 공들여 붙여준 여러 개의 센서가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화면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거였다.

지상에 있는 제작진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이사칠은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두 배우의 몸에 있는 작은 점 몇 개처럼 보이는 센서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기념비적인 작품을 훼손하는 오점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센서.

그렇지만 네 사람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줬고,

그중 두 사람은 화성까지 가게 해줄 센서.

고마운 동시에 사람들 눈에 띄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현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주에서 성인용 퍼포먼스를 펼치고 그걸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간이 될 날을

하루 앞둔 이사칠이 인사드립니다.

기분이 어떠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요,

다른 분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감개무량하다는 둥 떨린다는 둥 하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하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방송사고가 나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으로는 긴 고생도 내일이면 끝난다는 생각에 반갑기도 한데,

결국에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일은 다했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차분함을 유지하는 게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런 날이니까 어느 때보다도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물위키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을 부분은 ‘미국 활동’ 꼭지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6개월 정도는 ‘커밍 타이거(Coming Tiger)’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지만

메인스트림 포르노에 출연하지는 못하고

유료 구독 동영상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개인들의 작품에 출연하는 게 활동의 전부였다.

하아... 읽으니까 그때 생각나네요. 고생 참 많이 했죠.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때 생각을 하면 흐뭇해지고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네요.

뒤에 이어지는 얘기처럼 그때는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타고 싸구려 모텔을 전전했어요.

그놈의 모텔들, 참... 프리웨이(freeway) 옆에 있는 진짜 지저분한 싸구려 모텔인데

모텔비는 왜 싸구려가 아닌지 궁금하더라고요.

힘든 게... 한국에서 돈을 챙길 만큼 챙겨서 미국으로 오기는 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더라고요.

관광비자로 입국한 거라 비자 문제도 있었어요.

게다가 한국에서 온 무명 배우를 쓰려는 제작자가 있겠어요?


“그러던 중에 개인 영상 제작해서 플랫폼에 올리는 교포 분을 어찌어찌 알게 됐어요.

비자 문제 때문에 출연료를 현금으로 받았는데,

제 상황이 그러다보니 정식 출연료보다는 적은 액수를 받았어요.

뭐, 사람 사는 세상은 그렇잖아요.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감지덕지죠.

다행히 그분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친분이 있는 다른 아시아계 배우들한테 소개해주고

나랑 작업하고는 좋게 봐준 그분들이 다시 새 배우들을 소개해준 덕에

노숙하면서 배곯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죠.


“틈날 때마다 ‘밸리(the Valley)’에,

여기서 밸리는 이쪽 업계 회사들이 모여 있는

샌 페르난도 밸리(San Fernando Valley)를 말하는 건데요,

밸리 곳곳의 에이전시들을 돌아다녔어요.

프로필을 제출하려고요.

온라인으로 제출해도 됐지만 그렇게 해서는 왠지 성이 안 찼어요.

발품을 팔아 직접 찾아가 ‘내가 이 정도로 열의가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줘야 성이 차더라고요.

정말 간절했어요. 에이전시가 좋게 봐주면 비자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에이전시 입장에서는 제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듣도 보도 못한 동양인 남자가 배우를 하겠답시고 돌아다니는 게 우스워 보이지 않았겠어요?

사무실 들어가면 대놓고는 아니지만 은근히 무시하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그래도 열심히 다녔어요.

그러던 중에 은인을 만난 거예요.

그때 만나 친구가 돼서는 지금까지도 같이 일하는,

이번 방송도 함께 준비 중인 찰리 윤(Charlie Yoon)이라는 친구인데,

한국계 미국인 촬영감독이에요.

나중에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처음 봤을 때는

속으로 ‘동양인 남자가 무슨 포르노배우를 하겠다고 나서는 거냐?’고 비웃었는데,

그쪽 업계에 종사하는 교포들이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내 칭찬도 올라오고

사무실마다 꾸준히 얼굴을 비치는 걸 보고는 차츰 호감이 들면서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몇 번 만나 얼굴을 익힌 뒤에 점심 약속을 했는데,

점심 먹는 자리에서 내 사연을 들은 찰리가 제일 먼저 한 얘기가 비자 문제였어요.

‘네가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성공할 마음이 있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워킹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법적인 신분이 안정적이어야 하니까 일단은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권하더라고요.

뒤에 나오는 ‘학력’ 꼭지하고 이어지는 얘기인데요,

UCSM(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Monica)에,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모니카캠퍼스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한 건 찰리 윤의 조언 덕분이었어요.”


이사칠은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앨리스 원더 얘기를 꺼내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고 안도했다.

찰리 윤을 만난 얘기에서 ‘학력’ 꼭지로 바로 넘어가면

이후로 어느 시점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시민권을 획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이사칠 본인도 그와 관련한 얘기는 극구 피한다.

미국 시민과 위장 결혼해 시민권을 얻었을 거라는 추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문구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이사칠이 팬들에게 한 말 중에 거짓은 없었다.

단지 중요한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고인이 된 앨리스를 위해서도,

앨리스 얘기가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파할 에밀리를 위해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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