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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얼마 전에 떠나보냈기에
에밀리에게 언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였다.
의사의 꿈을 키우며 의대에 진학한 에밀리에게
언니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든 포르노라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언니가 예명으로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언니 때문에 느닷없이 그런 세계와 엮이게 된 에밀리 자신의 이름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법적인 형부가 된 포르노배우에게 애틋한 감정까지 품게 됐으니
에밀리에게 이것보다 더 이상한 세계는 있을 수 없었다.
운명의 손아귀에 들어가 운명의 변덕에 휘둘리는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에밀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언니의 직업을, 심하게는 언니의 존재를 입에 담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사칠의 존재는,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야릇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조차 싫었다.
이사칠을 향한 연심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거였고,
그 사람과 맺어지는 것은 당연히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언니 부부와 하는 식사는
그녀가 한동안 누리지 못하던 행복에 젖을 수 있게 해주는 흐뭇한 시간이었다.
얼마 안 가 닥쳐올 게 뻔한 불행이
그 작은 행복의 막도 내리게 만들 거라는 걸 잘 아는 그녀는 두렵고 슬펐다.
그녀의 행복과 슬픔과 두려움은 한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공존했다.
한편, 이사칠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앨리스는
기력을 찾을 때면 포르노업계에 있을 때 활발하게 교류해서 쌓은 인맥들에게 힘겹게 전화를 걸어
이사칠을 출연시켜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이사칠은 서서히 메인스트림에서 제작되는 작품들에 출연하게 됐다.
앨리스를 통해 인맥을 넓히고 이전에는 꿈만 꿨을 법한 출연 기회들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성공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게 아닌 건 당연했다.
메인스트림 포르노에 출연하는 여배우들의 인종은 다양했지만
남배우들의 인종은 백인과 흑인에만 국한돼있었다.
메인스트림 포르노의 세계에서 동양인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메인스트림에 진출한 사실상 최초의 동양인 남성인 이사칠은
앞에 놓인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다.
팬들이 가진 동양인 남성에 대한 편견,
팬들의 취향을 의식해야 하는 업계 내부의 동양인 남성에 대한 편견 등.
“메인스트림에 진출하면서 예명을 이사칠로 바꾼 그는
이른바 ‘이사칠 정신’으로 자신을 향한 편견과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이사칠은 ‘이사칠 정신’이라는 대목을 읽을 때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문장을 다 읽은 그는 잠시 키득거리고는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사칠 정신,’ 이 말을 처음으로 지은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지어낸 건지... 크크... ‘이사칠 정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사칠이 화면에 뜬 문장의 ‘이사칠 정신’에 커서를 올리고 클릭하자 별도의 페이지가 열렸다.
“포르노배우 이사칠의 인터뷰에서 비롯된 밈(meme).
이사칠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 중에 한
‘살면서 맺은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을
어느 네티즌이 ‘이사칠’을 넣어
‘살면서 맺은 모든 인연을 이사칠 소중히 여겨라’로 바꾸고는
이게 바로 ‘이사칠 정신’이라는 글을 올렸고
그러자 다른 네티즌이 장난삼아 e-sa-chil-spirit.com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하면서 화제가 됐다.
그렇지만 초기에는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사칠이 ‘포르노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고
그의 주장에 찬성하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 조직화되면서 이 운동을 대표하는 사이트로 떠올랐다.
‘이사칠 정신 선정위원회’가 꾸려진 것도 그때부터로,
위원회의 역할은 회원들이 ‘이사칠’이라는 말을 넣어 등록한 문구들을
(요식행위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 심의해 ‘이사칠 정신’으로 인정하고 사이트에 등재하는 것이다.
이사칠이 말했거나 이사칠과 관련이 있는 문장들 뿐 아니라
관련이 없더라도 인생살이에 유익하고 좋다는 말은 죄다 ‘이사칠 정신’으로 선정하는 게 관례로,
20**년 1월 1일 현재 1,300개가 넘는 문장이 등재돼있으며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1,300개가 넘는다라... 좀 어리둥절하군요.
여기 아래에 ‘이사칠 정신’으로 구분된 문장들이 있네요. 몇 개만 읽어볼게요.
이사칠 겸손하라.
팀의 성공을 위해, 나아가 주위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사칠 헌신하라.
이사칠 최선을 다하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들을 도우려 이사칠 애써라...
처음에 했다는 말 있잖아요. 인연하고 관련된 얘기요.
그건 메인스트림 진출 초기에 얻은 교훈에서 나온 얘기에요.
그때는 정말로 들어오는 제안은 웬만하면 다 했어요.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나한테 그런 제안이 들어온 건 다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여기 있잖아요, 이사칠 정신? ‘살면서 맺은 모든 인연을 이사칠 소중히 여겨라.’
“갑자기 애리조나에서 한 촬영이 생각나네요.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촬영지 주소가 애리조나였어요.
내비에 주소를 찍고 갔는데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목장이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촬영장으로 보이지를 않았어요.
50대 여자분이 나와서 목장주라고 자기를 소개했는데, 그분이 제작자 겸 배우인 거예요.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소들이 풀을 뜯는 벌판에 카메라랑 조명을 설치하고 촬영을 했죠.
소똥 냄새가 진동해서 집중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소들한테 밟힐까봐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도 열심히 촬영했습니다. 저는 프로니까요. 프로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작품의 완성도 아니겠어요?
“어렵사리 촬영을 마쳤어요.
시간이 괜찮으면 저녁 먹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애쓰는 크리에이터에서
노을 지는 근사한 애리조나 목장의 풍경을 즐기는 개인들로 돌아간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눴어요.
그때 물었죠. 왜 이걸 찍는 거냐고?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남편을 사별한 후에 만성질환이 돼버린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리고 자신처럼 외로움에 시달리는 다른 여성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찍는 거라고요.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이 무척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등장할까요?
그렇죠, 이사칠 정신.
외로운 여성을 외면하는 건 이사칠 정신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기획한 게 〈러브 인 USA(Love in USA)〉 시리즈였어요.
저와 촬영하고 싶다는 지원서를 보낸 여성분들을 찾아가 촬영하는 그 시리즈가 화제가 되면서
제 경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죠. 어때요, ‘이사칠 정신’? 대단하지 않나요?
“질문 중에 ‘왜 배우에만 머무르지 않고 감독이 되고 제작자가 된 거냐?’는 질문이 있더라고요.
사람 사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돈 문제잖아요?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을 겸하면 비용도 절감되고 남는 게 많으니까 제작을 겸했어요.
포르노업계의 비용과 수익 구조를 얼마나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비용을 줄이지 않으면 오래 살아남기가 어려워요.
작품을 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빠듯하거든요.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 마음속에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뭐랄까, ‘예술혼’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어요.
그걸 더블엑스 걸하고 영상을 찍을 때부터 느꼈어요.
더 야하고 에로틱하지만 말초적인 자극만 주는 영상에 머무르지 않는,
예술적인 작품을 찍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를 못하겠는 거예요.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당장은 배우 일로 생계를 꾸리지만
언젠가는 내 예술혼을 구현한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작품 하나를 만들어도 비전이 명확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게 제 욕심이에요.
모든 감독이 명확한 비전을 갖고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에요.
뛰어난 감독도 촬영장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있어요.
배우 경력 초기에 그런 상황에 처한 감독을 만나면
감독의 앞뒤 안 맞는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고 소화한 뒤에
제 생각을 설명하고 상의해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렇지만 감독들이 항상 제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서,
제 얘기를 무시하고 묵살해서 속이 많이 상했죠.
찰리 윤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이런 조언을 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데 어쨌든 너는 배우잖아. 감독 지시를 철저히 이행해야지.
감독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감독이 돼서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찍는 건 어떻겠어?
제작자와 감독이 되면 그에 따른 리스크를 감수해야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네 작품세계를 펼칠 수 있을 거야.’
작품세계. 멋있는 말 아닌가요?
그래서 제작도 하고 감독도 하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