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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람이 시체로 여기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앨리스 본인이었다.
훗날, 이사칠이 오줌에 젖은 옷을 갈아입힐 때 정신을 차린 앨리스는
이사칠을 알아보고는, 그리고 이사칠이 지금 해주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진담 같은 농담을 했었다.
“나랑 한 위장 결혼의 장점이 뭔지 알아, 허니?
굳이 법정에 가는 구질구질한 이혼절차를 밟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조금 있으면 사별로 끝날 테니까.”
그런 앨리스의 모습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결정할 사람의 몰골이라고 볼 사람은,
설령 그런 결심을 했더라도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의 몰골이라고 볼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미국 이민국(USCIS)이 위장 결혼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업무를 방기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찰리가 친한 변호사에게 의뢰해 서류상 결혼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이사칠은 모텔의 짐을 꾸려 앨리스의 집으로 이사했다.
앨리스는 오락가락하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집안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어질러진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제멋대로 팽개쳐져있는 옷을 빨고 정리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차고 있는 성인용 기저귀를 수시로 벗겨 몸을 닦아주고는 새 기저귀를 채워주는,
그리고 인터넷으로 배운 솜씨로 조리한 음식을 갓난아기에게 먹이듯 떠먹여주는
이사칠이 자신의 법적 남편이라는 걸 알아보고는 “허니”라고 부르고는 했다.
이사칠은 서류상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앨리스를 다정한 누이처럼,
인생행로라는 힘든 길을 함께 헤쳐 나가는 든든한 길벗처럼 보살폈다.
앨리스는 잠의 세계에서, 조금 더 나아가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왔을 때면
이사칠에게 따스한 눈빛과 엷은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애정이 아닌 길벗의 우정을 키워나가는 곳인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정기적으로 집을 급습한 건 이민국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멀찍이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두 사람의 동태를 감시했다.
당연히, 날마다 집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촬영을 위해 수시로 집을 나섰다가 귀가하는 이사칠 뿐이었다.
그런데 이사칠은 촬영이 끝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곧장 귀가해 앨리스를 보살피고 집안일을 했다.
적어도 이사칠의 동태만 놓고 봐서는 위장 결혼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민국 직원들은 집을 방문해 두 사람이 생활하는 모습에서 위장 결혼의 실마리를 찾기로 했다.
그들은 부정기적으로, 기습적으로 두 사람의 집을 방문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기만 했다.
그렇지만 빈손으로 집을 나서 터벅터벅 차로 걸어가는 그들의 심정은 날이 갈수록 달라졌다.
방문 초기에만 해도
그들의 심중에는 하다하다 전직 포르노배우와 현직 포르노배우까지 상대해야 하는
자신들의 한심한 처지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포르노를 찍으려고 죽기 직전인 여자와 위장 결혼하는 걸 서슴지 않는 몹쓸 놈을
반드시 응징하고야 말겠다는 증오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이사칠이 귀가하는 걸 확인하고 방문할 때마다
앨리스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이사칠을 본 그들의 생각은 슬슬 변해갔다.
‘처음이니까 저러는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생각하며 방문을 거듭했지만
앨리스를 정성스레 바라지하는 이사칠의 모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그런 모습에 감동하기에 이르렀다.
이사칠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 이렇게 속삭이는 직원까지 있었다.
“당신들의 결혼은 당신이 시민권을 얻게 해주려는 위장 결혼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설령 위장 결혼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그러는 것처럼 미국 시민을 최선을 다해 수발하는 사람이라면
미국 시민인 앨리스(실제로 이 직원이 말한 이름은 앨리스의 본명이었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당신에게 시민권을 주는 건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법적인 결혼을 한 부부들 중에도
당신처럼 배우자를 정성껏 보살피는 사람은 찾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보면서
결혼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관계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새삼 고민해보게 됐습니다.”
이민국이 몇 달 뒤 두 사람의 결혼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내리면서
이사칠과 앨리스는 합법적인 부부가 됐고 이사칠은 미국 시민이 됐다.
두 사람의 거처를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두 명이 있었다.
간간이 들러 안부를 묻는 찰리 윤,
그리고 지금 풍기는 이지적인 분위기를 그때도 풍기고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앳된 얼굴이던 의대생 에밀리 박.
앨리스의 동생인 에밀리가 처음 본 이사칠의 모습은
테라스의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구토를 하고도 그걸 깨닫지도 못하는 앨리스를
물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아주는 모습이었다.
에밀리는 그 광경을 보고는 무척이나 놀랐다.
에밀리는 이사칠에 대한 고마움으로 복받치는 감정을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꾹꾹 누르고 있다가 집을 나서서 차에 오르자마자,
우주의 기준을 적용해서 표현하자면 지름 15센티미터 크기의 눈물을 쏟아냈다.
에밀리는 찰리에게서 위장 결혼 얘기를 듣고는 “알았다”고 대답했었다.
그래서 앨리스의 집에 낯선 남자인 이사칠이 있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놀란 건 앨리스를 보살피는 이사칠의 다정한 손길 때문이었다.
에밀리의 눈에 들어온 이사칠의 모습은
시민권을 취득할 목적으로 위장 결혼을 해서 법적 남편이 된 후
법적 부인이 죽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 몹쓸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병으로 신음하는 아내를 정성껏 보살피는 진짜 남편의 모습이었다.
에밀리는 꾸준히 찾아와 이민국으로부터 법적 부부로 인정받은 언니 부부와 식사를 했다.
앨리스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이사칠의 음식 솜씨는 일취월장했고,
이사칠이 정성껏 차려낸 음식을 먹으려고 언니의 집을 찾는 에밀리의 표정과 눈빛은 조금씩 밝아졌다.
그녀가 언니의 집을 찾을 때마다 발목에 채워진 납덩이도 조금씩 녹아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사칠이 그녀 앞에 놓을 음식을 정갈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잔뜩 신경을 쓴다는 것도,
날이 갈수록 음식을 맛보는 자신의 표정을 점점 더 긴장된 표정으로 살핀다는 것도 눈치 챘다.
에밀리는 이사칠이 차려주는 밥을 오랫동안 많이 먹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무척이나 싫었다.
에밀리는 자신이 맺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상대를 사랑하게 됐다는 걸,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늪에 두 발을 들인 신세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살이에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