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247> ★ 31 ★
이유를 찾아냈는데,
나 자신을 애써 합리화하려고 억지로 만들어낸 것 같은 이유는
“포르노도 결국에는 인간이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해 만든 동영상 작품인데,
그의 말마따나 ‘지평을 넓힌’ 작품에 대해서는
설령 그게 포르노일지라도 작품의 의의를 감안해서 리뷰를 써야 옳다”는 거였다.
세계적인 화제가 된 영상작품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는 건
영화평론가이자 인문사회 분야에 관한 잡다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동영상 작품의 제작현장을 방문해
제작과정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목격한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우주라는 생경한 환경에서 25분에 걸친 생방송을 무리 없이 성공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업이므로 리뷰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됐다.
그래서 생방송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나면
그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게 옳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사칠에게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미안함도
이런 결론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줬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제목 “스페이스 너바나”가 불경에 쓰이는 한자와 비슷한 느낌의 폰트로 등장한 후
목탁소리와 「반야심경」을 읊는 독경소리가 깔리는 가운데
화면 양쪽에서 각각 등장한 이사칠과 그레이스 오가
짙은 색 스킨슈트를 벗고 알몸이 되는 순간,
슈퍼히어로 “네이키드 나이트”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은 슈퍼히어로의 코스튬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그걸 벗고 알몸이었을 때 진정으로 완성된다는 걸 깨닫는다는 (황당한) 내용의
〈네이키드 나이트〉 시리즈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사칠이 야심차게 만든,
실패한 건 분명하지만 어떻게 보면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는 작품인
〈네이키드 나이트: 아이맥스 버전(IMAX Version)〉과
그걸 관람하는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패러디한 〈네이키드 나이트〉 시리즈는
그쪽 업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재미있는 웃음거리로 회자됐다.
그런데 작품이 인기를 모으고 얼마 안 있어
이사칠이 시리즈의 1편인 〈네이키드 나이트〉의 일부분을
아이맥스 포맷으로 개작한 후
작품을 30분 분량으로 축약해 아이맥스 상영관에 걸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뭘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맥스는 제작비가 상당히 많이 드는 포맷이다.
그런데 태권도에 갓 입문한 아이들이 보여줄 법한 몸놀림으로
초등학교 학예회에 어울릴 법한 우스운 액션을 보여준 포르노배우들을 데리고
드넓은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채울 액션신을 만들겠다는 건가?
아무리 히트한 포르노라고 해도
삼류 코미디에나 등장할 조악한 액션을
극장에서 아이맥스 포맷으로 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사칠은 사방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동안에도
포르노 팬들을 대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해서
제작비의 30퍼센트를 조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제작비를 회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제정신으로 세운 계획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나온,
이사칠이 아이맥스 포맷으로 찍은 부분이 어설픈 액션신이 아니라,
이번 생방송에서도 공연한 그레이스 오와 그가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찢어발긴 뒤에 몸을 섞는 정사신이라는 기사를 보고는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한 이 선택이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아이맥스 포맷으로 촬영한 (실제) 정사신은
영화평론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정사신의 비주얼은 어떨까?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컴퓨터 모니터로, 대형 TV로 감상하는 포르노와 얼마나 다른 느낌일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궁금증은 억제할 길이 없었다.
영화업계와 포르노업계가
“큰 손실을 입게 될 게 뻔한데 왜 저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걸까?” 의아해하는 가운데
작품이 완성됐다는 보도가 나오는가 싶더니
극장을 대관하는 단계에서 또 다른 논란이 생겼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아준 팬들은
작품이 완성되자 아이맥스 상영관을 빌리는 데 필요한 대관료를 역시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아
이사칠의 제작사에 전달했다.
팬들의 성원에 힘입은 제작사는
뉴욕과 시카고와 LA 세 곳의 아이맥스 상영관을 대관하려 했으나,
대관을 위해 접촉한 극장들이
자기네 스크린에서 포르노작품을 상영할 수는 없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상영관을 잡지 못하면서 작품의 상영이 무산될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포르노 팬들,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운동가들이 발끈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논란은 팬들이 차별행위를 한다며 극장들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지경으로 치달았고,
결국 포르노와 관련된 사람들을 상대로 장기간 소송에 엮여봐야
이로울 게 없을 거라고 판단한 극장들이
딱 하루 3회만 영화를 상영한다는 조건에 극장을 대관해주기로 합의하면서
〈네이키드 나이트: 아이맥스 버전〉은 극장에 걸리게 됐다.
극장 상영이 결정되면서 이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지에 대한 내 고민이 시작됐다.
한동안 진지한 고민을 한 나는
앞서 얘기한 “평론가로서 의무” 어쩌고 하는 이유를 내세워 LA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도 고민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항공권을 구매하면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까지,
비행기가 LAX에 착륙한 순간까지도
이게 과연 봐야 할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를 나 자신에게 끝없이 물어봤는데,
어느 틈엔가 나는 극장 앞에 있었다.
인파가 넘실거리는 극장 앞은 시끌벅적했다.
극장 앞 광장 복판에는
“표현의 자유”를 목 놓아 외치는 시위대들이
“이사칠”을 연호하는 팬들과 함께 스스럼없이 얼굴을 드러내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모퉁이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반가운 얼굴들은
여러 영화제에서 안면을 트고 교류해온 여러 나라 평론가들의 얼굴이었다.
영화평론가란 그런 인간들이다.
평생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큰 영상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번에 보고 나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영상이 있다면
자존심을 다 내다버리더라도 그 영상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자들이다.
그렇게 직업적 호기심에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사회적 위신이 실추될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은 그들은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봐 모자와 가발, 선글라스,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감추고
현장에 넘쳐나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어서 빨리 극장에 들어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사칠이 급조된 단상에 올라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야심차게, 또는 무모하게 제작한 영화가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극장에 걸렸으니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굴어도 무방할 텐데도
그는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로 팬들을 향한 고마움을 감추지 않았다.
극장 문이 열리자 그는 입장하는 팬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사칠의 눈과 내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놀랍게도 이사칠이 나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나를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야구모자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벽하게 가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그의 능력이 그야말로 ‘네이키드 나이트’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인데
나도 나와 똑같은 차림새로 악착같이 얼굴을 가리려한 다른 평론가들을 몇 명이나 알아봤으니
그게 대단한 초능력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