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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辭說)이 너무도 길었다.
이제는 정말로 〈너바나〉 얘기를 해보자.
이사칠이 “역사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니 어쩌니 주장해봐야
〈너바나〉는 결국 포르노다.
그러니 그 작품을 리뷰하는 건 포르노를 리뷰하는 것인데,
생전 그런 글을 써본 적이 없는 탓에 어떻게 써야할지 참조하려고
인터넷에서 포르노 리뷰를 몇 편 읽어봤다.
그런데 그 리뷰들 대부분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이 어떤 동작을 취했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소리를 질렀는지를 정리한 글에 불과했다.
그런 글은 쓰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쓸 재주도 없다.
그래서 이사칠이 보낸 자료에 실린 〈너바나〉 기획 의도를 참고해,
〈너바나〉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이 어떠했고
이사칠의 어떤 의도가 거기에 담겼으며
그 의도가 얼마나 잘 구현됐는지를 살피는 글을 쓰기로 했다.
우선, 방송이 시작되고 등장하는 화면은 배우들이 없는 공간을 보여준다.
군데군데 산과 나무와 구름과 새가 그려진 동양화풍 그림이
우주정거장 선실의 벽인 게 분명한 공간을 채우고는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사칠이 보내준 우주정거장 선실의 벽 사진을 보면,
그림을 그린 한지(韓紙)를 벽지로 붙인 덕에
삭막하기만 한 금속성 공간이
따스한 느낌이 그윽하게 흘러나오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카메라가 조금씩 뒤로 빠지면 벽지 앞 공간에 떠있는 물체들이 보인다.
미풍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나풀거리는 것은
여러 색깔의 한지를 세로로 길게 잘라 만든 리본들이다.
역시 한지로 만든 형형색색의 조화(造花)들도
화면 전체에 균형감을 불어넣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한지로 만든 리본과 조화들은 강렬하게 각인되는 색감이 아닌,
보는 이의 마음에 은은하게 젖어드는 한지 특유의 색감을 풍긴다.
이 공간에는 한지로 만든 물건들만 떠있는 게 아니다.
〈너바나〉가 어떤 성격의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물건들도 떠있다.
이 공간을 상하좌우로 누비며 공연할 배우들이
손만 뻗으면 잡아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된 여러 종류의 성인용품들이다.
이사칠은 평소에도 작품에 동양적인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게 너무 지나쳐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해 먹는다는 비난도 많이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 비난은 적어도 〈너바나〉의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바나〉에서 그가 추구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해먹는 게 아니라 동양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사칠은 “화성 정착자들(MS)” 프로젝트의 대원으로 뽑힐 가능성이 대두됐을 때,
그러니까 〈너바나〉를 생방송으로 송출할 가능성이 커졌을 때
머릿속에 번뜩 불교 콘셉트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철학은
“포르노라고 해서 밑도 끝도 없이 복수(複數)의 인원이 마구잡이로 뒤엉키거나
혼자서 자기를 위로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포르노에도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세계관과 예술혼을 담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포르노는
“짐승의 야성(野性)으로 허겁지겁 맛을 본 후 현자의 초연함으로 되새김질하게 되는 포르노”라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은 시청자의 내면에서 폭발하기 직전까지 치달은 원초적 욕망을 강하게 자극해서
위험천만한 폭발력을 안전하게 외부로 배출하게 해주고,
이후로는 차분한 현자의 마음가짐을 되찾은 시청자가
자신이 감상했던 작품을 찬찬히 곱씹으며 작품에 담긴 예술정신을 음미할 수 있는 포르노.”
나는 이사칠이 한지를 배경과 소품의 소재로 택한 의도를 처음에는 너무 협소하게만 생각했었다.
한지는 그가 밝힌 포르노 철학에 따라
“우주에서 나누는 뜨거운 사랑을 통해
‘인간은 우주에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냉철한 깨달음을 얻으면 몰아지경에 빠지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주제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에 따라 선택된 소재라고만,
“열반”을 뜻하는 단어인 “너바나”를 제목에 넣으면서
불교적이고 동양적인 느낌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에 따라 선택한 소재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사칠이 보내온 자료를 본 결과,
작품의 배경을 구현하는 데 한지를 활용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입장에서 고심한 끝에 내린 선택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사칠이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공한 학문인 경제학의 출발점은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에는 자원의 제약이 따른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 전제는 당연히 창작활동에도 적용된다.
결국 모든 예술작품은 작품을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비용의 한계라는 제약 아래 창작된다.
지상이 아닌 우주에서 제작되는 작품이라고 해서 이런 원칙의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이사칠에 따르면
〈너바나〉의 창작에 가장 큰 제약으로 작용한 것은
제작에 필요한 소품과 장비를 지상에서 우주정거장까지 수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구에 있는 물건을 우주정거장까지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1g짜리 물건이라 할지라도
대기권 밖으로 운반하려면 그에 필요한 연료를 로켓에 주입해야 하는데
그 연료 자체가 추진력을 얻는 데 활용되기 전까지는 별도의 무게를 가진 화물이다.
그러므로 우주왕복선에 실린 화물의 무게 1g는 그냥 1g에 그치지 않는다.
그걸 운반하는 데 필요한 연료의 무게까지 감안해야 하므로
화물의 무게가 커질수록 그걸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가파르게 증가한다.
그러니 〈너바나〉 제작진이 제작을 위해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의 무게에도 제약이 심했다.
그렇기에 이사칠은 한지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였다고 밝혔다.
가벼워서 운반비용을 줄일 수 있고,
여러 겹으로 접을 수 있으므로 차지하는 공간이 작으며,
동양적인 분위기의 은은한 색으로 물들일 수 있고,
사용 후에도 휴지로 쓰거나 꼬아서 짧은 밧줄로 만드는 등
여러 용도로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니까.
더불어 이사칠이 업계에 뛰어든 이후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온 세상에 알린다”는 목표에 잘 부합하는 소재이기도 하니까.
이사칠은 한지를 선택하는 묘수를 낸 덕에
우주정거장을 소개하는 많은 동영상을 통해 익숙해진 정거장 내부의 삭막한 공간을
작품의 비전을 제법 잘 반영한 그럴듯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한지는 이사칠이 〈너바나〉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삼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이사칠은 불교를 콘셉트로 잡자고 결심한 순간 불쑥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고 했다.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 이미지였다.
비천상에 묘사된 승천하는 천인(天人)들은
우주정거장의 미소중력 상황에 처한 우주인에게 딱 어울리는 인물들로,
그들을 등장인물로 설정하면
몽환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작품을 연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다.
허공에 뜬 천인들이 입은 천의(天衣)의 너울거리는 옷자락과
승천을 경축하듯 내리는 꽃비를 덧붙이면 이 기념비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성스러운 불화(佛畫) 같은 비주얼을 빚어낼 수 있을 거라는 게 이사칠의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택한 소품들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지로 만든 소품들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몸을 섞는,
또는 몸을 섞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이사칠과 그레이스 오를
열락에 휩싸인 채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로 승천하는
천인 같은 존재로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군데군데 배치돼 두 배우가 적절하게 사용한,
그러고는 손을 놓으면 원래 있던 자리를 다소곳이 지키는 성인용품들은
쾌감을 극대화해 승천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