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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Mar 23. 2020

아날로그 매니아의 디지털 분투기

디지털보단 돼지털이 익숙해서....

최근 한 전자책 어플 유료 회원에 가입했다. 그것도 종이책 정기구독까지 포함한 프리미엄 회원제로.

사실 모니터나 핸드폰 화면으로 읽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고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주기적으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요즘의 신간들을 확인하곤 했다. 분야별로 이책 저책 기웃거리다 보면 두어시간은 금새 지나가는 광화문 교보는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놀기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들렀다.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책을 살겸, 간만에 활자의 세계에서 혼자 놀아볼 겸 갔더랬다. 그런데 김영하 작가 신작이 아무데도 없는것이다. 교보문고 한국 소설 신간에 대문짝만하게 홍보되어야 마땅한 책이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제서야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번 책은 밀리의 서재 독점으로만 출판된 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야만 종이책도 받아볼 수 있었다. 종이책를 꼭 갖고 싶었으니 결국 가입해버렸다.


나는 사실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아날로그 인간'이다. 아직도 종이책과 CD를 사서 모은다. 좋아하는 밴드의 신보가 나오면 꼭 내 CD장에 소장해야만 할 것 같아서 교보 핫트랙스에 간다. 사실 요즘 CD는 K-POP 아이돌 팬들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도 사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레트로 열풍으로 LP가 더 잘팔린다는 기사를 읽었다. (요즘 아이돌 CD는 음악을 듣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사진집, 팬사인회 당첨권, 포토카드 등이 들어있는 종합 굿즈 선물 세트의 목적이 강하다) 결혼할 때도 남들은 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샀겠지만, 난 굳이 CD 플레이어 기능이 있는 미니 오디오를 샀다.

그런데 이 아날로그 인간인 나를 유료 회원에 가입시키다니, 밀리의 서재 마케팅의 승리다.


나는 디지털 세대 이면서도 디지털 세대가 아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지금의 20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핸드폰이 있었던 '디지털 네이티브 (Digital Native)' 세대라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는 아날로그의 감성과 디지털의 편리함을 모두 경험한 디지털 이주민 (Digital Immagrants)세대다. 초등학교때 '진돗개 1호' 컴퓨터가 생겼고, 중학교 때 처음으로 '폴더폰'을 가져봤다.

내 선배 세대들은 우리를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 취급하지만 나의 후배 세대들에 비하면 나는 원시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특히나 아날로그 정체성을 버리기 싫어하는 원시인 중의 원시인이었다. 그래서 온갖 디지털 및 IT 등은 나의 언어가 아니었고, 항상 첨단 테크놀로지 앞에 작아졌다.  


그런데 요즘 회사에서 디지털이 한창 난리다. 디지털 네이티브도 아닌 내가, 매일 디지털 관련 기획을 '해대느라' 토가 나올 지경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오프라인 이벤트들이 줄줄이 취소 되면서, 공연과 전시 등 문화 행사를 하는 업계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우리 회사같이 디지털 쪽으로라도 자구책을 마련하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요즘 시대에 '디지털' 이라는 단어는 엄청나게 광범위 한 뜻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컴퓨터를 이용한 어떤 프로그램이나 행위가 아닌, 너무나 많고 다양한 솔루션과 플랫폼들로 존재한다. 분야별로도 너무 많은 새로운 정보들이 매일 생산되고 계속 변하기 때문에 앞서 나가는건 둘째 치고 같이 발걸음을 따라 가기에도 벅차다.

VR, 라이브 스트리밍, 핀테크, OTT ... 이 중 어느 것도 나와 친한(?) 아이들은 없었는데,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안하던 내가 본의 아니게 요즘 이런 것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먹은 정보를 소화하기 급급할 뿐, 정보들 속에서 뭔가 방향성을 찾아내는 인사이트는 절대 없는것 같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디지털과 IT 분야 에서는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방식과 매뉴얼로 이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얼마나 지독한지! 전 세계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랜시간동안 선진국의 지위를 누리며 안일하게 지내온 유럽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사실 유럽에서 어학연수든 교환학생이든 몇 달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사회 인프라 시스템이 한국보다 한참 느리고 답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지독하게 열심히 살고, 트렌디함을 추구하며, 남들 보다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 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사람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 세계적 재난 사태에 이정도로 대응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디지털 강국 코리아에 살고 일하는 나는 정작 피곤하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또 그 변화를 캐치하지 못하면 뒤떨어지고 마는 이 정글같은 사회가 때로 버겁다. 성장은 할 수 있지만 성장만 하다가 인간은 못 되는 것이 아닌지 가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주엔 꼭 교보문고를 갈 것이다
갓 마른 인쇄소 윤전기 잉크 냄새를 맡으며, 아날로그의 세계를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돌아오면서는 어느 LP 바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90년대 락음악을 신청하면서 병맥주를 마셔야지.


디지털에 지친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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