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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Feb 09. 2024

술꾼의 임신일기 2

알딸딸한 용기를 얻는 도피처

회사 가기 무서운 날이 있다. 


어려운 보고를 하는 날이라던가, 아주 빡센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행사 전날이라던가... 뭔가 산이 눈앞에 있는것 같은 나는 한잔으로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 


최근에 영국 국공립 미술관과 미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영국인 담당자 2명이 참석하는 미팅이었는데, 한 사람은 예전에 첫 회사에서 전시담당자로 일했을 때 같이 프로젝트를 했던 디렉터다. 5년이 지나 오랜만에 보려니, 그리고 간만에 외국인(그것도 영국사람) 2명을 상대하려니 며칠 전 부터 은근히 긴장이 됐다. 


그들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출국 바로 전 약간 늦은 오후시간대의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금 빨리 도착해 자리를 잡고 나니 해피아워가 한창으로 옆 테이블들에서는 다들 맥주 한잔씩 하고 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아, 나도 예전이었으면 지금 딱 한잔 시켜서 이 긴장된 기분을 좀 풀텐데... 그러면 약간의 용기를 얻고 업된 기운으로 미팅의 분위기를 좀 더 활기차게 이끌 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현실은 캐모마일 티를 시켜서 반도 안마시고 끝났다. 


이렇게 긴장되는 미팅이나 행사 오프닝을 앞두고 약간의 긴장을 푸는 한 모금, 모든 일을 다 끝마치고 보상으로 마시는 시원한 한잔이 내 회사생활에서 굉장히 큰 비빌 언덕이었던것 같다. 

비록 약간 알딸딸한 용기일지라도 너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는데... (크흑)

요즘은 그래서 이런 저런 스트레스에 정면으로 맞서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사실 배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도망갈 구석이 없으니 할 수 없이 그저 맨정신에 맞딱뜨리게 되는 것이다. 술이라는 도피처 없이 맨몸의 나로써 이런 상황을, 기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아직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나는 좋아하는 것과 취미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음악, 독서, 운동, 글쓰는것 등 모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취미 활동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보다 더 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술이었다. 술을 안마시니 좋아했던 다른 취미 활동들을 할 여유가 많아지긴 했는데, 그런 활동들도 결국 술한잔 없으니 조금은 심심하다. 


그리고 도파민의 힘은 무섭다. 스트레스를 풀어보고자 술 대신 수영을 빡세게 하거나 책을 왕창 사서 읽어보거나 했는데, 결국 초콜렛에게 패배했다. 도파민은 도파민으로만 치유가 가능한 것인가... 


최근 너무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원했던 '갓생'인가.... 

술 마시던 시절에는 항상 갓생을 동경하면서도 언제나 술로 마무리 되는 일상을 살며 괴리감에 괴로워 했다. 하지만 요즘은 출근하면서는 팟캐스트로 영어 공부를 하고, 퇴근 후에는 수영을 갔다가, 집에 와서는 집안일과 요리를 하고, 야식과 맥주 없이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게 내가 원했던 갓생 같기는 한데... 마음 속으로는 뭔가 허전한 것도 같다. 


이것들을 진정으로 즐기며 충만한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갓생러가 되는 것일 텐데... 

아직 나는 갓생과는 멀었나보다. 소소한 술꾼의 삶을 동경하는 무늬만 갓생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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