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모리꼬네 #EnnioMorricone #RIP 당신의 음악은 또 다른 주인공이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1998)은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그 배와 함께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과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감정과 그 가치를 이어주는 예술, 그리고 예술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와 인생을 그린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1988), 미술품과 인생이 담긴 ‘베스트 오퍼 The best Offer’(2013)와 함께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예술 3부작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2002년 개봉했다가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2020년 재개봉하였다.
이토록 우아한 예술
1900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배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기가 있다. 처음 아기를 발견한 석탄실의 노동자 데니는 그에게 1900(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900년은 자유와 성공의 나라였던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된 20세기의 첫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리고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이민자의 나라, 문화 다양성과 대중성을 향해 나아갔던 20세기에도 여전히 라이브 음악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영화 속 음악은 각기 다른 색깔이다.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일등석 부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곡은 흥겹지만, 간절한 위안이 필요한 삼등석 서민에게 음악은 마음을 토닥이고 포옹해준다. 타고난 예술가인 1900은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저 음악이 필요한 공간에, 음악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곡을 연주한다.
음악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피아노 대결 장면이다. 세계적인 재즈 연주자 젤리 롤 모튼은 1900의 소문을 듣고 피아노 대결을 위해 찾아온다. 세기의 대결을 바라는 관객들 앞에서 1900은 적극적이지 않다. 그에게 음악은 대결의 수단도, 승리를 위한 도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젤리 롤 모튼의 음악을 듣고 일반 관객처럼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으로 관객을 울린 젤리 롤 모튼이 오직 대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고난도 기교를 선보인 후 제 실력에 감동해 스스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1900의 마음이 바뀐다. 1900은 극강의 피아노 테크닉을 보여주는 ‘Enduring Movement’를 연주하며 젤리 롤 모튼의 오만함을 비웃는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연주하는 예술가를 조롱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세상의 예술, 예술의 세상
첫눈에 반한 여인이 생긴 후, 1900은 육지에 내려 가정도 이루고 피아노 연주로 돈도 벌어보려 한다. 인생 처음으로 배에서 내리려던 날, 그 앞에 놓인 무한대의 세상을 바라보다 그는 다시 배로 돌아온다. 배와 육지를 잇는 계단 한가운데 서서 머나먼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생애 마지막 순간, 1900은 친구 맥스에게 자기 삶의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는다.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어느 피아노나 건반은 88개야. 그건 무섭지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배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수백만 개의 건반이 보였어. 너무 많아서 절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수백만 개의 건반. 그거론 연주할 수가 없어.
평생 버지니아호가 자신의 세계이고, 그 속에서 연주하는 피아노가 오롯한 자신만의 인생이었던 1900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인생의 길이 뚜렷하게 정해져, 아주 작은 세상에 갇혀 예술만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많은 예술가의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1900이 절대 배에서 내리지 않을 것을 직감한 맥스는 폭발을 앞둔 버지니아 호 구석구석을 뒤져 1900을 찾는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가기보다는 배와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1900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를 놓아준다.
1900의 죽음을 묵도한 맥스에게 악기상 주인은 헐값으로 구매했던 맥스의 트럼펫을 돌려준다. 1900을 통해 악기상 주인도 맥스도 트럼펫이 단순히 버릴 수 있는 악기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맥스는 그렇게 힘들어 놓아버리려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음악이라는 숙명과 예술가로 사는 삶을 받아들인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태어나 한 번도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한 남자를 통해 예술가의 삶과 예술의 가치,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그 삶의 가치를 반추하게 만든다. 마치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것 같지만, 사실 놓아버린 후에 더 강해지는 삶의 의미라는 점에서 1900의 죽음은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그리고 음악의 힘으로 다시 살아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쩌면 예술이란 것은 마침표로 인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줄임표가 되어 우리 인생과 늘 함께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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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OST 정보]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90’ (1999), SONY Classical 발매
작곡 : Ennio Morricone
연주 : Fausto Anzelmo, Gianni Butta, Gianni Oddi, Cicci Santucci
이미 영화음악의 거장이었지만 엔리오 모리꼬네의 명성이 세계로 뻗은 것은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함께 한 ‘시네마천국’ 덕이 크다. 전설 속 피아니스트가 등장하는 영화의 특성상, 판타지에 가까운 전설 속 음악을 재현해 내야 하는데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제1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를 이끈다. 주인공 1990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잔잔하게 담아낸 ‘Playing love’가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피아노 대결 장면에 등장하는 ‘Enduring Movement’는 화면 속에서 마치 여러 개의 손이 동시에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듯, 한 사람이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 한다. 이 곡은 31곡이 담긴 유럽 오리지널 OST에서는 들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 21곡으로 줄여 발매된 OST에서는 들을 수 없다. 국내 출시 OST는 미국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