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음악 공연과 음악 영화가 어우러지는 콘셉트도 확실하고 제천이라는 지역도 소담스럽게 예뻐 참 좋아하는 영화제 중의 하나다. 작년 이맘때에는 제천까지 어떻게 갈지, 누구랑 갈지, 어떤 영화와 공연을 볼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제천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는 것이 맞겠다. 코로나19로 올해는 비대면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올해 16회를 맞이한, 제천이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제가 지역성을 버리고 온라인으로 개최되다니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좋았던 점은 상영시간이 겹쳐 놓치게 되는 작품 없이,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언제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놓쳐서 아쉬운 영화가 있는 것도, 영화관을 옮겨 다니며 설레는 걸음을 하는 것도, 북적이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무척 그립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무심하게 놓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는 중이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영화 팬들의 기대와 열기 때문에 영화 자체보다 더 뜨거운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올해는 혼자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주제에 맞게 정성스럽게 선택된 영화들이라 영화제가 추구하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았고, 작품들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객석을 관객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그 시절을 기다리며 공유하고 싶은 세 편의 영화를 골라 보았다. 영화제는 끝났지만, 언젠가 관객들로 가득 찬 극장에서 이 작품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해 본다.
개막작 <다시 만난 날들>
감독 : 심찬양
출연 : 홍이삭, 장하은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번째 장편 영화 <어둔 밤>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심찬양 감독의 작품이라, 정말 개막작을 보듯 첫 번째로 보았다. 영화를 향한 절절한 애정 고백을 페이크 다큐에 담아낸 이 작품은 덕후를 덕후하는 이야기로, 세련되진 않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어린 이야기로 관객들을 끝내 울컥하게 만들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통해 세계 최초 개봉하는 심찬양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다시 만난 날들>은 음악 덕후를 덕후하는 이야기다. 페이크 다큐였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은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하지만 홍이삭과 장하은이라는 실제 뮤지션을 캐스팅한 결과 연기하는 것 같지 않은 연기와 생생한 음악 사이에서 다큐멘터리 같은 현실감을 만들어 낸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인디밴드 세션으로 겨우 살아가는 주인공 태일은 음악이 힘들다. 그러다 과거 밴드 멤버였던 지원이 일하는 시골 음악학원에서 중학생 록밴드를 만난다. 자신과 달리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는 지원과 서툴지만 열정이 가득한 아이들을 통해 태일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던 과거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얼핏 꿈을 향한 낯간지러운 희망을 이야기하려나 싶지만 가공되지 않은 진심은 끝내 진심으로 남는다.
영화는 줄곧 주인공 뿐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의 시들해진 삶에도 촉촉하게 물을 뿌려준다. 아이들은 자라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함께 키우는 법이다. 심찬양 감독은 <다시 만난 날들>을 통해 정말 음악과 음악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나오는 시선과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만난 날들' 이미지 컷
세계음악영화의흐름_국제경쟁 부문_<온 더 레코드>
감독 : 커비 딕, 에이미 지어링
2020년 팬데믹 시대, 어쩌면 숨겨진 사람들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경찰들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그 차별과 편견을 전세계 사람들이 확인했다. 커비딕과 에이미 지어링 감독은 <온 더 레코드>를 통해 미국 음악계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 여성이 어떤 차별과 편견, 그리고 폭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쫓는다. 영화는 미국 힙합 음악 씬이, 더욱 크게는 미국 사회가 아프리칸 아메리칸 여성에게 행하는 심리적 차별, 그리고 물리적 성폭행에 맞서는 드류 딕슨의 당당하지만 고단한 삶 속으로 들어가 여성들과 손을 맞잡는다.
이 다큐멘터리는 권력자들의 지위남용이 성차별과 성폭행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러셀 시몬스의 성폭행 이후 드류 딕슨은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데 20년 이상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힙합 음악의 대부라 불리는 러셀 시몬스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의 자부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미투운동으로 명성을 잃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은 정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하비 와인스타인으로 인해 촉발된 영화계의 #미투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시작된 것 같지만, 사실 소수자들을 위한 진짜 미투운동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커비 딕과 에이미 지어링 감독은 유령처럼 떠도는 차별과 권력에 의한 폭행이 범죄라는 사실을 꾹꾹 눌러 써내려간다.
'온 더 레코드' 스틸 컷
홈 커밍 데이_<서칭 포 슈가맨>
16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5년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상징하는 11편의 영화를 선정하였다. 그 중 <서칭 포 슈가맨>은 한 예능프로그램의 이름으로 사용되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아마 오프라인에서 영화제가 열렸다면, 현장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을 작품 중 하나일 것 같다.
1970년대 로드리게즈는 디트로이트 뒷골목에서 노래하다가 앨범을 냈지만, 아무 반응도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앨범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건너가면서 엄청난 인기를 끈다. 그의 노래 가사 덕분에 남아공에서 그의 노래는 마치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노래와 함께 로드리게즈는 영웅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정보는 아무 곳에도 없다. 그래서 그의 앨범 ≪콜드 팩트≫에 실려 있는 노래의 제목을 따서 지은 ‘슈가맨’이라는 애칭의 가수 로드리게즈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말릭 벤젤룰 감독은 로드리게즈를 찾아내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로드리게즈라는 인물이 아니라, 어긋난 삶의 시간이라는 주제에 있다.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서의 명성과 상관없이 미국의 한 시골에서 너무나 평범한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진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금 내 삶과 달리, 다른 하늘 아래의 나는 영웅이라는 아이러니. 어쩌면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삶의 회한, 그럼에도 살아있어 누릴 수 있는 행운과 같은 발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되지만 어쩐지 헛헛하고 쓸쓸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