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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형상과 그 상상력의 미장센

'프렌치 디스패치' 리뷰

03.jpg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 컷

사실 우리는 텍스트의 가치가 이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세상을 살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면서 텍스트는 과하게 친절해졌다. 어쩌면 텍스트가 친절해지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멈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서적 교감이나 안목 없이 기계적으로 재구성된 텍스트는 독자의 정서도 균일하게 짜깁기 한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들이 텍스트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인 상상력의 확장과 그 가치를 놓친다.


텍스트의 형상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블라제에는 다양한 사건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가 발간되고 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저널리스트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잡지에 실을 4개의 섹션_도시와 예술, 정치와 푸드 섹션과 마지막 부고 기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얼핏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읽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행동이다. 텍스트에 담겨 있는 감정에 공감하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체험하는 순간, 텍스트는 개인의 정서, 그리고 켜켜이 쌓인 안목과 맞닿아 감정의 변화를 이끈다. 당연히 좋은 텍스트는 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하고, 더 많은 감정의 소동을 만들어낸다. 이런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은 단순히 독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이야기가 숨겨진 회화나 건축, 당연하게도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영상이라는 텍스트로 보여주면서 고전적 의미로서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의 최근작 ‘프렌치 디스패치’는 아예 텍스트로 가득한 잡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텍스트는 회화 같은 고정된 이미지가 되기도, 무성영화처럼 색채가 지워지기도 하고, 만화가 되기도 하면서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무한대를 영상에 기록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빨라진 감각의 체험이 놓치고 있는 고전적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감독의 전작들처럼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화면에 가만히 담기기만 해도 좋은 배우들이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연이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텍스트 읽기의 적극적 판타지 속, 이야기 자체의 놀라운 확장성 속에 배우들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영화는 전혀 어수선하지 않다.

휙 훑어보기 쉬운 짧은 영상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활자로 기록되는 이야기는 독자의 눈이 아니라 머리와 심장을 깨운다. 그래서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되는 시대에 대한 아쉬움을 대신해 ‘프렌치 디스패치’는 관객들에게 독서의 체험을 하게 한다. 저널과 저널리스트가 그간 만들어온 기록의 가치와 텍스트의 확장성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마치 낡은 책장에서 꺼낸 고전소설이 오래 된 것이라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음악이라는 캐릭터와 텍스트의 미장센

이야기는 잡지의 챕터를 순서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한 권의 잡지를 편집하는 과정과 잡지 그 자체를 읽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한다. 자연광과 실제 건물이 아닌 과장된 색감과 조명으로 치장된 장면들은 정지된 회화, 혹은 연극의 가장 극적인 한 장면처럼 보인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이다.

그는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작품 안에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지 살펴본 후 작곡을 수락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이다. 음악이 영상에 앞서면 과잉이 되고, 영상의 의미를 놓치면 결핍이 되는 특성을 최대한 고려하면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빼어난 감각은 화면이 전하는 이야기에 음악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여기에 더해 ‘프렌치 디스패치’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프레임을 멈춰 소장하고 싶은 독특한 미장센이다. 배경과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화면 비율과 색감은 텍스트를 읽을 때의 독자들의 상상력처럼 다채롭다. 거기에 시대의 공기를 놓치지 않은 에피소드 마다 특유의 풍자를 담았다.

살인죄로 수감 중인 화가의 작품은 교활한 미술상에 의해 가치가 왜곡되고, 외국인 노동자와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년들의 변혁 운동에 필요한 선언문을 기성세대가 고쳐준다는 설정은 블랙 코미디가 된다. 예술과 사회에 대한 시각과 해석은 켜켜이 많은 텍스트의 층위에 가려져 있어 관객 개개인은 맥락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의 자극을 받을 것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소멸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단순히 낭만적 정서로 포장하지 않는다. 비정한 시대를 낭만과 웃음으로 넘기며 지켜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어느 날 고대 유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기록해 내었던 잡지의 폐간 이야기에는 낭만적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에 대한 시니컬한 그리움이 담긴다.

매달 일정한 시간에 독자를 만나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하기 때문에 잡지를 만드는 시간은 늘 독자의 시간보다 앞서야 한다. 저널리스트와 에디터들은 기한을 넘기면 죽는다는 각오로 ‘데드dead’라인을 지킨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챕터에는 편집장의 사망 소식이 담기는데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지면 위에 봉인된 소중한 기억 같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사람들의 진짜 삶을 가장 정직하게 담아내기 위해 열정을 쏟은 저널리스트들의 진심을 존경하는 영화다. 그래서 저널리스트의 활자를 걸음처럼 따라가면서 화면 위에 그 의미를 인장처럼 새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화살처럼 쏟아지는 텍스트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이 조금 버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내용이 궁금해 한 번 쓱 훑어보던 잡지를 다시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정독하듯, 여러 번 다시 봐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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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운드트랙 정보]

The French Dispatch / Alexandre Desplat | Universal / ABKCO


1. Obituary by Alexandre Desplat

2. After You've Gone by Gene Austin & Candy And CoCo

3. Simone, Naked, Cell Block-J Hobby Room by Alexandre Desplat

4. Fiasco by Gus Viseur

5. Moses Rosenthaler by Alexandre Desplat

6. I've Seen That Face Before (Libertango) by Grace Jones

7. Mouthwash De Menthe by Alexandre Desplat

8. Sonata For Mandolin And Guitar A-Dur K.331, Adagio by Boris Björn Bagger & Detlef Tewes

9. Cadazio Uncles And Nephew Gallery by Alexandre Desplat

10. “Inseguimento al Taxi (The Chase)” by Mario Nascimbene

11. The Berensen Lectures at the Clampette Collection by Alexandre Desplat

12. L'Ultima Volta (From "Malamondo") by Ennio Morricone

13. Tu M'as Trop Menti by Chantal Goya

14. J'en déduis que je t'aime by Charles Aznavour

15. Fugue No.2 in C minor by The Swingle Singers

16. Adagio (Bof Compte A Rebours) by Georges Delerue

17. Police Cooking by Alexandre Desplat

18. The Private Dining Room Of The Police Commissioner by Alexandre Desplat

19. Kidnappers Lair by Alexandre Desplat

20. A Multi-Pronged Battle Plan by Alexandre Desplat

21. Blackbird Pie by Alexandre Desplat

22. Commandos, Guerillas, Snipers, Climbers And The Jeroboam by Alexandre Desplat

23. Animated Car Chase by Alexandre Desplat

24. Lt. Nescaffier (Seeking Something Missing...) by Alexandre Desplat

25. Aline by Jarvis Cocker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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