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 씨네세이(CinesSay)
월컹대다 멈춰 서게 만드는 그리움이 있다. 맨발 가득 한기가 느껴지는 눈밭에서도 따뜻했던 그 눈빛, 책 냄새 가득한 도서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살랑 날리던 그 사람의 머리카락, 꾹꾹 눌러쓴 편지의 요철을 쓰다듬어 보았던 손끝의 기억. 그날의 날씨, 그날의 감정, 그리고 그날의 냄새가 하나의 주머니에 담겨 휙 날아온다. 그렇게 문득 잊고 있다가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잊고 있었는데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내 곁에 서 있는 그런 그리움이 있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의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는 등산을 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히로코는 그리운 마음에 이츠키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오타루에 살고 있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에게 배달된다. 히로코에게 편지를 받은 오타루의 후지이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낸다. 그리고 편지가 오가면서 오랜 추억이 현재의 그들 사이로 스며든다.
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는 눈처럼 새하얗지만, 겨울만큼 시린 기억으로 남은 첫사랑을 소환하는 영화다. 1999년 한국에서 처음 개봉된 이후 여러 번의 재개봉을 거쳐 2022년 겨울에도 재개봉하였다. 국내 개봉한 일본 실사 영화 중 흥행 1위의 자리를 아직까지 지키며 한국의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러브 레터>는 아쉬운 기억과 그 사이에 숨겨둔 진심 사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이다. 편지라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순백의 눈밭에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는 아직까지 풋풋하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관객이 마음을 줄 인물들이 많아 공감의 폭이 넓다. 관객들은 때론 사랑을 떠나보낸 후 통증을 극복하고 오롯한 한 사람으로 되살아난 히로코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제 자신도 모르고 지내온 소중한 감정을 현재로 끌어들여 새로운 그리움을 떠올리는 이츠키에 이입을 한다. 제 각각의 쓸쓸하고 초연한 그 모습들은 우리 자신과 닮아 있어 아련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러브 레터>는 첫사랑의 감각을 시각적인 기호로 끊임없이 되새겨 놓는 영화다. 그래서 장면 장면을 박제시켜 방 한구석에 세워두고 싶은 그런 액자 같은 영화다. 이와이 슌지만의 섬세한 시선이 살아 있는 카메라는 순결한 눈 덩이 사이, 순수한 첫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쓸쓸함 사이를 오간다.
<러브레터>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지는 못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는 뭉툭하지만 여전히 아픈 통증으로 심장을 콕콕 찌른다.
생각해 보니 그리움은 딸꾹질 같다. 갑자기 불쑥 찾아오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멈추는 법을 모른다. 호흡을 멈춰보기도 하고 물도 마셔보지만 쉽게 그치는 법이 없다. 그러다가도 딸꾹질이 멈추는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을 되찾는다. 하지만 또 언제 요상한 소리를 내며 내 고르던 호흡을 흔들며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움 속에는 언제나 ‘그대의 내’가 아닌 ‘그때의 내’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닌 그 시절의 나인지도 모른다. <러브 레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히로코가 눈밭으로 달려가 죽은 이츠키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이다. 그녀가 외치는 안부 인사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 여전히 잘 지내야 하는 자기 자신에게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잘 지내고 계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게 나의 안부를 아주 나지막이 나에게 물어본다.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