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푹푹한 시험지 같은 삶을 위한 위안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뷰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03.jpg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 컷

두꺼운데 얼기설기 만들어져 잘 써지지도, 잘 지워지지도 않는 푹푹한 종이가 있다. 단단하지 않은 그런 종이는 쉽게 해지거나 찢어지기 쉽다. 가끔 우리 삶은 그런 종이에 인쇄된 시험지 같다. 문제는 어렵고, 당연히 답은 모르는데 풀이과정은 잘 써지지도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주인공 지우는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만 갈 수 있는 자사고를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친구들이 다니는 고액 과외는 꿈도 꾸지 못하는 그의 성적은 늘 하위권이다. 처참한 내신 성적으로 전학을 권유받지만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어느 날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한 야간 경비원 이학성이이 수학 천재라는 것을 알게 된 지우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며 성적을 위한 수학이 아닌 진짜 수학의 맛을 깨친다. 신분도 자신의 사연도 모두 숨기고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이학성은 지우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박동훈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주춤대는 두 가지 꿈을 서로 응원하는 이야기다. 풀이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착한 문제집의 정답이 나와 있는 영화는 관객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모범답안 같은 이야기를 올곧게 풀어낸다.

시작부터 차별로 시작된 지우의 삶은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헤맨다. 오직 순수한 수학적 학문을 위해 탈북했지만 이후에도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수학을 공부할 수 없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학성은 삶을 놓았다. 두 사람은 각자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사치가 되는 현실 앞에서 먹먹하게 멈춰 서 있다.

박동훈 감독은 나아갈 수도 없고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먹먹한 우리의 삶을 함께 엮는다. 꿈을 접은 사람도, 꿈을 꾸는 사람도 모두 두렵다. 지금 내가 내딛는 새로운 길 위의 발걸음이 정말 나를 미래로 향하게 할지, 그러다 좌절하지 않을지 막연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그런 두 사람을 줄곧 응원한다. 그럼에도 꿈을 꿔야하는 이유를 공식보다는 정답을 알려주면서 격려한다. 그래야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활기차고, 멋진 나. 단지 헛된 꿈일지라도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드는 다른 나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정해진 정답을 향해 직진하는 영화라 중간 중간 현실성이 비워진 곳이 있는데 배우들의 촘촘하고 진심어린 연기와 함께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이 그 사이를 채운다. 이학성이 좋아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이학성과 지우를 이어준다. 수학과 예술의 관계, 수학을 음악으로 표현한 ‘파이 송’처럼 순수한 수학이라는 영역은 순수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품고 가족의 소중함과 끝내 지켜야할 마음까지 고루 담아낸다. 그래서 잃어버린 꿈을 찾아 떠나는 길에 꽃을 뿌려주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양지로 이끌어낸다, 삶이 힘들어도 끝내 마주잡은 손이 위로가 된다는 메시지는 마음을 꿈틀대게 만든다.

비록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누군가 옆에서 할 수 있다며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오롯이 그렇게 믿어주는 진심으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힘겹게 버티고 걸어오면서 너덜너덜해졌을 사람들의 마음을 솜씨 좋은 바느질로 기운다.

다소 뻔하긴 하지만 교과서 같다는 말은, 정확하고 바르다는 의미에서 긍정을 향해 더 열려 있다.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가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고, 믿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내민 손은 보송보송하고 꽤 따뜻하다.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진 꿈이 남긴 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