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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엄마가 아니랍니다.

영화 <로스트 도터> 리뷰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bodo_still_03.jpg '로스트 도터' 스틸 컷

너무너무 끔찍해서 달아나고 싶었다. 너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덜컥 발목이 잡혀 주저앉은 것 같아 무서웠다. 너를 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설레지 않았다. 나는 너와 나누는 시간 보다 나의 성공, 나만을 위한 시간이 더 중요하다. 너를 위해 갈기갈기 찢어 써야 하는 시간이 아프다. 나는 내 시간의 온전한 주인이고 싶었다. 만약 엄마가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악의에 찬 거짓말이 아니라, 마음에 담았지만 차마 하지 못한 진심이라면?


처음, 엄마는 아니었던 여자

그리스의 외딴 섬으로 홀로 휴가를 온 대학 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는 종일 해변에 머물면서 해변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러다 니나(다코타 존슨)와 그녀의 딸이 눈에 들어오는데 자꾸 신경 쓰인다. 니나와 그녀의 딸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두 딸과 함께 했던 레다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온다. 그러다 니나의 딸이 사라진다.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는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The lost daughter』을 원작으로, 배우 매기 질렌할의 연출한 작품이다. 원작자는 이 영화를 보고 소설 속에 등장한 모든 충동을 포착하고 이미지로 바꾼 작품이라 극찬했고, 베니스국제영화제 각본상, 아카데미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질렌할 감독은 데뷔작으로 전 세계 영화제에서 103개 부문 후보, 37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여성이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ㆍ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 모성(母性)의 사전적 정의이다. 우리는 땅과 하늘, 바다를 다스리는 여신들조차 자식에게 한없이 헌신하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배웠다. 그래서 모성이 본능이 아니라 학습으로 강요된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은 불손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살얼음을 딛고 서 있는 수많은 엄마라는 후천적 이름을 달고 있는 여자들의 불안한 마음과 함께 한다. 어떤 여자도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의 희생을 그저 숭고하기만 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화두는 결국 생채기를 내고, 마음을 따끔거리게 만든다.

‘잃어버린 아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는 줄곧 우리가 몰랐던 엄마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되묻는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였던 그 여자,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엄마에 앞선 한 여자의 과거가 영화가 계속 되짚어 밝은 길이다. 질렌할 감독은 레다의 젊은 시절과 젊은 니나의 현재를 뒤섞으면서 영화의 이야기를 엄마와 딸이라는 모녀로 한정짓지 않고, 여성이라는 커다란 원 속에 담아보려 한다.


이제, 엄마이기도 한 여자

끝내 버리지 못했던, 그래서 누군가를 버려서라도 얻고 싶었던 나의 시간, 나의 성공, 나의 성취. 시간의 발에 걸려 털썩 주저 앉아버린 순간에도 끝내 놓지 않았던 내 삶. 하지만 레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욕망에 당당했던 그녀는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아이들이 없으니 기분이 어땠냐는 니나의 물음에 레다는 ‘너무 좋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엄마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 수 년이 지난 후에도 수치스러운 감정과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본심과 죄의식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는 기이하고 잔인한데, 너무 처연해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눈 돌리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 봐야하는 이야기 속에서 올리비아 콜맨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끝내 붕괴되지 않은 척 하는 레다의 마음을 관객들에게 설득한다.

‘로스트 도터’는 모성애와 그 희생이 인간의 가장 숭고한 혹은 고귀한 것이라는, 그래서 모성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문질러 지워 자식의 그림자로 살지 않고 당당히 빛을 받아 살고 싶은 한 여성의 욕심을 누가 탓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레다의 편에 서서 부서진 모성을 옹호하지도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조금 더 객관적으로, 어쩌면 니나의 미래일 수도 있는 젊은 시절 레다의 이야기 속으로 침잠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영화는 유연하고도 단단하게 모성이 강제되어야 할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설득한다.

엄마는 당연히 아이를 낳아 키운다 생각하지만 세상 수많은 여성들은 항상 선택을 한다. 키울 것인가, 버릴 것인가. 그리고 키우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매기 질렌할 감독은 가족이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엄마의 역할에 대한 불편함을 뛰어넘는 화두를 꺼내놓는다.

모성에 대한 신화는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신화를 부숴야 실화라는 그 생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로스트 도터’는 딸인 여성, 딸이자 엄마인 여성, 혹은 앞으로 엄마가 될 딸들에게 엄마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말을 건넨다. 아늑하다가도 아득한, 고마웠다가, 그리웠다가 끝내 지긋지긋해지는 엄마라는 이름 앞에 레다와 니나라는 각자 고유한 이름이 있었다 말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엄마가 아닌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영화 사운드트랙 정보]

The lost daughter/ Sony Music / Music by Dickon Hinchliffe

레다는 젊은 시절을 환기할수록 점점 더 붕괴된다. 레다의 정서를 현재의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음악감독 딕콘 힌크리프는 빈티지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고전적 사운드의 표현을 위해 디지털 녹음을 피하고 옛날 녹음기술과 아날로그 장비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왠지 아련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1. Leda

2. Leda Swims

3. Glass of Water

4. Mina

5. I’m Working

6. Octopus

7. Pine Cone

8. Broken Glass

9. The Offer

10. The Affair

11. Dance Party

12. The Great Wings

13. Playground

14. Do You Need A Hand?

15. Unnatural Mother

16. Let Me Tell You All About It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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