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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Aug 31. 2023

마음의 소리, 소리의 마음

브뤼노 시슈 감독의 <마에스트로> 리뷰

'마에스트로' 스틸 컷

정말 그걸 말로 해야 알아? 되묻지만 정말 어떤 진심은 말이건 행동이건 또렷하게 보여줘야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반대로 어떤 마음은 드러낼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굳이 그걸 말로 해서, 마음이 상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마음을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애를 써야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소홀한 일이 마음을 전하는 일인 것 같다.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나의 우상아버지

차세대 거장으로 인정받는 지휘자 드니 뒤마르(이반 아탈)와 이미 거장인 프랑수와 뒤마르(피에르 아르디티)는 부자 관계다. 프랑수와는 모두의 존경을 받는 지휘자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상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함께, 자신의 위치로 재빠르게 솟아오르는 아들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낀다. 

브뤼노 시슈 감독의 ‘마에스트로’(Maestro(s))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빅투아르상을 수상하는 아들 드니 뒤마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드니는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다. 아버지가 참석했다면 이 자리가 더 빛났을 거라고 말하지만, 이미 아버지의 공백은 영화의 다음 이야기를 암시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한다기 보다는 줄곧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직업을 떠나, 우리가 자주 만나는 어색하게 마음이 멀어져 있는 여느 부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묘하게 긴장감을 느끼지만 날을 세워 생채기를 내는 사이는 또 아니다. 균열된 마음과 멀어진 몸의 거리가 미묘하고 복잡하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갈등은 프랑수와가 받은 한통의 전화 때문에 파장이 된다. 평생 꿈꿔오던 라 스칼라 무대를 이끌어달라는 전화였다. 스스로 노쇠해졌다는 생각 때문에 늘어져 있던 그가 들뜬 마음으로 삶의 활력을 찾아가지만, 사실 라 스칼라 무대에 섭외된 것은 아들 드니였다. 담당자의 실수로 전화가 잘못 전해진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들떠 기뻐하고 자랑해야할 일이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드니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드니에게 아버지는 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애를 써 노력했는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더더우기 아버지는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열등감이었다. 드디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은데, 평생 바라던 아버지의 꿈을 자신이 뺏어버린 것 같은 죄의식과 연민 앞에서 갈등한다.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2011년 이스라엘 영화 ‘꼬장꼬장 슈콜닉 교수의 남모를 비밀’(Footnote)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교수였던 원작의 설정을 지휘자로 바꾸면서 가족 음악영화가 되었다. 원작이 신랄하고 풍자적인 내용이었다면 ‘마에스트로’는 주인공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기 때문에 음악과 함께 조금 더 순한 마음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나의 라이벌아들 

영화 ‘마에스트로’는 부자의 이야기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직접 서술하지 않는다. 마치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주인공 주변의 인물이 구성하고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조화롭게 어루만져 부자의 이야기를 화음처럼 쌓아간다. 브루노 시슈 감독은 프랑수와의 아내이자 드니의 엄마, 드니의 아들, 드니의 전 부인과 현재 애인 등 주변 인물을 통해 부자의 캐릭터를 쌓아가고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회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구성 때문에 자칫 신파에 빠지기 쉬운 가족의 이야기가 제법 담백하게 보인다. 더불어 두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드니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 속에도 지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온 프랑수와의 곁에도 늘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가족들의 묵묵한 걸음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가족의 이야기로 그 층위를 다양하게 넓히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두 사람의 소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의 마음과 결정을 함께해야한다는 이야기가 꽤 설득력이 있다. 첨예하게 갈등하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가족이 아니라 조금 더 조화롭게 서로를 아끼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흡사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처럼 화음을 위해서는 조화와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갈등의 깊이가 조금 약하고, 부자간의 갈등이 너무 쉽게 희석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마에스트로’의 마지막은 다행히도 뻔하지 않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앞서 이룬 아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 잔잔한 연출 덕분이다. 지휘자가 주인공인 영화답게 친숙한 클래식 음악은 드니와 프랑수와, 그리고 가족들의 마음을 엮고 풀고 이어간다. 말하지 못한 말과 미처 읽지 못한 마음 사이를 음악이 채워준다. 

최근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속 음악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마에스트로’는 클래식 팬들의 마음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연주곡으로 가득하다. 영화의 이야기처럼 심도 있는 음악을 만나기보다는 귀에 익숙하고 친숙해서 편해지는 음악이다. 브람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의 명곡을 거쳐 라 스칼라에서의 엔딩 곡은 울컥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열등감과 미움은 조화 속 불협화음을 만든다. 이해라는 마음의 지휘자가 뾰족해진 마음의 음표를 다듬어주면 복잡한 갈등도 조화로워진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진심과 아버지의 삶 그 자체를 오롯이 긍정하고 존중하는 마음. 어긋한 시간을 재촉하거나 거스르는 대신 서로를 존중하고 그 마음을 인정하는 시간, 그 진심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을 보여준다.  


[OST 정보플로렌시아 디 콘실리오 Florencia Di Concilio / Vendome Records

플로렌시아 디 콘실리오가 작곡한 오리지널 음악과 함께 멜팅 팝 오케스트라, 앤 그라뷘, 니콜라스 기로가 연주한 곡들이 담겨있다. 침묵과 침묵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의 빈곳을 채워줬던 음악은 발매된 OST를 통해 다시 들을 수 있다.


1. Symphonie No. 9 en Ré Mineur, Op. 125: 2. Scherzo (Molto Vicave) (Melting Pop Orchestra, Anne Gravoin & Nicolas Guiraud) 

2. Nouvelle  

3. Tu es belle 

4. Intermezzo No. 7 en La Mineur, Op. 76 (Denis Pascal) 

5. Quid pro quo  

6. Père et fils  

7. Vérités  

8. 14 romanes, Op. 34: 14. Vocalise (Melting Pop Orchestra, Anne Gravoin & Nicolas Guiraud)  

9. Le pont  

10. Laudate dominum (Julie-Anne Moutongo-Black)  

11. Souvenir  

12. Sérénade (Anne Gravouin)  

13. Orson  

14. La scène  

15. Les Noces de Figaro, K. 492: Ouverture (Melting Pop Orchestra, Anne Gravouin & Nicolas Guiraud)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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