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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Jun 29. 2023

음표라는 시간, 음악이라는 인생을 살다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리뷰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스틸 컷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순간 귓가에 음악이 들리고 순식간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위대한 자연의 어떤 풍광을 만났을 때처럼 음악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억하게 하는 사람, 클래식부터 실험적인 음악까지 실패한 적 없이 영화를 더 빛나게 하거나, 때론 영화보다 더 빛나는 음악을 만든 사람, 한 사람의 음악인을 넘어 영화계의 거대한 장인이 된 사람, 때론 영화보다 더 기억나는 사람, 엔니오 모리꼬네다. 


다름이라는 아름다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 보면 아마 키스씬 보다 먼저 음악이 들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처럼 영화보다 더 큰 기억, 장면보다 앞서 들려오는 음악을 만들어온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화음악 작곡가라는 타이틀 보다 더 큰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영화 음악과 엔니오의 이야기를 담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는 2020년에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거장을 영상으로 기리는 일종의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그와 인연을 맺은 영화감독, 음악인들을 순서대로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엔니오가 직접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엔니오는 가족들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트럼펫 연주를 하고 여전히 돈을 벌기 위해 상업영화음악을 시작했지만, 클래식이 자신의 뿌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영화음악이 천박하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내고 싶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영화 음악을 시작했을 때 음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편견을 이기겠다는 그의 다짐처럼 그는 영화 음악을 부속물이 아닌 하나의 당당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서부극의 영화음악을 시작으로 영화 산업에서 영화음악이 예술로 차지하는 비중을 넓히고, 중요도를 강조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화가 하나의 산업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성장시켰다.

당연하게도 엔니오는 단순히 음악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나리오를 분석했고, 감독과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영화의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하나의 캐릭터로 창조해 낸다. 다큐멘터리는 그런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연대기로 그려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영화사를 집대성하는 역할을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모리꼬네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언터쳐블’의 영웅 테마를 선택한 일화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에게 엔니오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시계태엽 오렌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개입했던 에피소드 등 영화와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듣는 동안 그의 인생은 영화가 되고, 영화인이 되고, 영화사가 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거짓말까지 하면서 엔니오를 독점하고 싶어 했던 이유를 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엔니오의 영화음악을 동그랗게 이어주는 건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이다. 권선징악의 뚜렷한 메시지가 있던 기존의 서부극과 달리 누가 진짜 악당인지 알 수 없는, 주인공조차 악당 같은 소위 무법자 시리즈,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기억되는 서부 사나이의 이미지는 세르지오 레오네가 정립했다. 

당연하게도 형식의 변화를 넘어 하나의 장르를 변화시킨 건 엔니오의 음악이다. 휘파람과 하모니카, 그리고 일렉트릭 기타 선율을 넣어 이전의 서부극이 가진 음악의 가벼움을 처연함으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기억하는 서부극의 음악 역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이전과 늘 달랐고, 그 다름은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음악으로 미장센을 만들다

사실 엔니오 모리꼬네처럼 전설적인 영향력을 미친,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작품 경력을 지닌 음악인은 거의 없다. 60년에 걸친 경력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 400편이 넘는 음악을 작곡했고, 100개가 넘는 콘서트 작품에도 참여했다. 

단순히 영화 음악 작곡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영화 음악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는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해내면서, 음악 그 자체에 담긴 숭고함과 완성된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때문에 관객뿐만 아니라 음악 애호가를 매료시킨다. 

엔니오는 영상의 도움 없이도 음악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가 지닌 음악의 자부심, 그리고 자존심을 오롯이 이해하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엔니오의 ‘영화음악’을 들려주기보다 거대한 예술가 엔니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엔니오 : 더 메아스트로’는 엔니오라는 사람에 집중하지만 엔니오의 잡담이나 개인사는 거의 담지 않는다. 2020년 7월에 세상을 떠난 후, 엔니오처럼 영향력 있는 거장을 기리는 다큐멘터리의 목적 자체가 찬사이자 헌정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영화사나 사담에 관심이 있는 관객보다, 한 사람의 장인이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싶은 관객들을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1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구분해 내는 음표 하나하나의 차이를 함께 집중해서 들여다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엔니오가 만들어내는 음표와 음악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지만 거대한 악보처럼 펼쳐지면서 하나의 미장센이 된다.  

엔니오는 골든 글로브 음악상 3회, 그래미상 3회를 수상했지만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었다. 여섯 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수상하지 못했고 2007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와의 인연은 공로상으로 끝난 거라 생각하겠지만 엔니오는 달랐다. 공로상을 수상한 9년 뒤, 2016년 88세의 나이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 ‘헤이트풀 8’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그가 가장 잘하던 서부극의 음악을 기대했지만 엔니오는 이전의 상징적 음악을 다 지우고 새로운 서부극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 

영화음악을 집대성한 다큐멘터리지만 OST가 별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려낸 것은 영화의 음악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이기 때문이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는 보고 있지만 들리는 영화다. 매 시간이 음표로 만들어지고, 인생이 음악으로 직조된, 한 사람의 인생은 음악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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