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절과 시대로 남은 모두의 이야기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리뷰

1.jpg <타이타닉> 스틸 컷

어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연히 창고에서 발견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보석(사실은 잡동사니지만, 보석이라 믿었던)상자 속 추억의 물건들처럼 뚜껑을 열면 다시 쓱 그 시절로 이끄는 그리움이 있다.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상관없이, 폴짝 뛰어들고 싶어질 만큼 폭신폭신하고 몽글몽글한 감각으로 남아있는 추억이 있다. 가진 것이 없어 초라했던 시간도, 무작정 사랑한다 말하기엔 염치없던 시간도,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똘똘 뭉쳐 쓱 하나의 덩이로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단어는 바로 ‘시절’이다.


시절의 기록들

1912년, 타이타닉이라는 거대한 배는 꿈의 공간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 포커 판에서 3등실 티켓을 따낸 떠돌이 예술가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친구 파브리치오와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타이타닉 호에 오른다. 철강재벌인 망나니 칼 호클리와 어쩔 수 없이 약혼한 로즈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진실한 사랑을 꿈꾸던 로즈 역시 생애 처음 만나는 황홀한 사랑의 감정 앞에서 흔들린다.

‘타이타닉’이 개봉 25주년을 맞아 4K 3D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하였다. 영화 ‘타이타닉’은 역사에 기록된 영화다. 우리의 시절 속에 1998년은 ‘타이타닉’의 시대였다. 당시 ‘타이타닉’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었다. 모두가 이야기했고, 모두가 주제곡을 흥얼거리고, 배만 타면 팔을 벌리는 동작을 따라했다. 하나의 예술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1998년 당시 전 세계는 대공황의 시절이었고, 한국은 특히 IMF로 힘든 시절이었다. ‘타이타닉’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흥행을 장담할 수 없는 영화에 너무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물을 배경으로 엄청난 돈을 들인 영화는 소위 망한다는 속설을 <워터월드>와 <컷스로트 아일랜드> 등의 영화가 증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제임스 카메론이 유일하게 흥행에 실패한 영화 <어비스> 역시 물을 배경을 한 영화였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시대극인데다 상영시간도 너무 길었다. 결국 제작사에서는 중도에 제작 포기 선언을 했고, 제임스 카메론은 개런티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제작을 밀어붙였다.

한국에서는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서 철수하던 시절이었고, 직배사를 통해 영화가 유통되던 시절이었다. 외화가 유출된다며 ‘타이타닉’ 관람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영시간은 195분으로 지나치게 길었다. 당시 VHS 비디오 하나에 다 담기지 않아서 상하편으로 나눠 발매가 되었다.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아니던 시절, 단관 개봉으로 상영회차를 확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서울관객 197만을 동원하였다. 1993년 ‘서편제’의 100만 돌파가 사회적 이벤트였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이었다. 대기업들은 배급이 아닌, 극장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쇼핑 몰처럼 국내 최초로 극장을 모아둔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가 처음 시작된 것도 1998년이었다.


타이타닉의 시대, 우리의 이야기

영화는 체험이고, 관객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꿈과 사랑의 이야기다. 다소 뻔하지만 ‘타이타닉’은 그 정의가 딱 맞아 떨어지는 영화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가공의 인물의 전설적인 사랑을 녹여 넣은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관객들은 타이타닉호의 침몰 장면보다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한다. 이야기의 진심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타이타닉’은 수많은 클리셰를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25년 만에 다시 만난 ‘타이타닉’은 처음 보는 것처럼 묘하게 낯선 이야기로 가득하다. 단순히 추억에만 의지할 수 있는 영화라면 흥미가 떨어졌을 것 같다.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 하나하나가 멋지다. CG의 기술력은 물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까지 시대를 넘어 한 시절의 기억이 될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고전적 서사에 갇히는 대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여성상을 담았다. 개봉 당시에는 케이트 윈슬렛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비해 나이 들어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묘하게도 2023년에 만난 젊은 날의 케이트 윈슬렛은 진취적이고 아름답다. 여성이라 구조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로즈는 재난 속에서 주저앉아 울지 않고, 홀로 남은 잭을 직접 구하러 가는 등 재난과 맞선다.

‘타이타닉’은 제임스 카메론이 줄곧 강조하던 문명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인류의 기술은 언제나 허점이 있으며,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제임스 카메론은 2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로 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한 영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타이타닉호의 재난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많은 재난을 겪었다. 그리고 매번 재난은 영화보다 더 허구 같은 다큐멘터리의 장르가 된 것 같다. 과거가 교훈이 되지 못한 건지, 여전히 재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다. 재난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구한 것은 개개인의 노력과 진심이다.

역사는 기록하지만, 예술은 기억한다. 영화 속 현재의 사람들은 역사적 비극을 반성하지 않고,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제임스 카메론은 역사적 사실 속에 사실은 보석보다 더 빛나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역사의 기록을 모티브로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을 품는다는 점에서 ‘타이타닉’의 이야기는 25년 후에도 여전히 빛날 것 같다.


[OST 정보] Music by James Horner / Sony Music

제임스 호너가 전곡을 작곡했고, 오케스트라 녹음시 지휘도 맡았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걸작 OST로 지금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 3,000만장이 판매되었고, 역사적으로는 가장 많이 팔린 오케스트라 사운드트랙으로 기록되었다.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은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1. Never an Absolution _ James Horner

2. Distant Memories _ James Horner

3. Southampton _ James Horner

4. Rose _ James Horner

5. Leaving Port _ James Horner

6. Take Her to Sea, Mr. Murdoch _ James Horner

7. Hard to Starboard _ James Horner

8. Unable to Stay, Unwilling to Leave _ James Horner

9. The Sinking _ James Horner

10. Death of Titanic _ James Horner

11. A Promise Kept _ James Horner

12. A Life So Changed _ James Horner

13. An Ocean of Memories _ James Horner

14. My Heart Will Go On (Love Theme from "Titanic") _ Celine Dion

15. Hymn to the Sea _ James Horner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