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이>의 강수연, 추모 에세이
2022년 5월. 굉장히 화사했던 봄날이었다. 강수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랜 동안 헛헛한 마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상했다. 영화라는 예술 속에 강수연은 하나의 상징이었고,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아주 오랜 친구를, 믿고 곁에 두었던 든든한 누나를, 동경하던 진짜 스타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빠졌다.
2023년 1월. 넷플릭스를 통해 연상호 감독의 영화 <정이>의 스트리밍이 시작되었다. 2013년 이후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강수연의 복귀작이다. 신파 SF라는 부정적인 평도 많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하다는 단점도 분명하지만 <정이>는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화면에 마지막으로 각인시킨 작품이다. 영화를 평하는 일과 상관없이 그 의미가 너무나 크고 무겁고 아련해서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버리고 우주에 쉘터를 만들어 이주한 미래의 어느 날, 군인 윤정이(김현주)는 수십 년째 이어져 온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전설의 용병이지만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된다.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는 정이의 뇌를 복제해 전투로봇을 개발하려 한다. 정이의 딸 윤서형(강수연)은 35년 뒤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으로 엄마를 계속해서 되살리려 한다. 하지만 연구에 진전이 없자, 크로노이드는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처음 모녀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당연히 강수연이 엄마, 김현주가 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이> 속에서 강수연은 엄마 정이를 되살리기 위해 청춘을 바친 딸이다. 늙지 않은 채 존재하는 엄마를 닮은 로봇과 그런 엄마 보다 나이가 더 많은 딸의 관계가 묘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 속 강수연은 늘 홀로인, 혹은 주로 홀로 선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강수연은 영화를 통해 세상 모든 여성의 이야기를 품었었다. 그녀는 오롯이 여성, 강수연이라는 이름으로 <정이>의 서사를 열고, 완성한다.
<정이>의 주인공 서형은 아직 엄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보다 어느 새 더 나이가 들어버린 딸이다. 모녀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슬픔과 정서가 닿은 풍경이 노골적인 한국식 신파라고 비판하는 관점도 있지만, <정이>가 향하는 정서는 그리움이다. 기계와 인간이 뒤섞인 채 살아가는 갇힌 공간은 이미 우리가 어린 시절 익숙하게 봐 오던 고전 SF 시리즈 <스타 트랙>이나 SF의 교과서라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정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지만, 굉장히 고전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의 서사를 전달한다. 20세기의 연기 스타일을 재현하는 강수연은 고전적인 이야기에 클래식한 정서를 더한다. 가끔 결이 다른 연기 톤 때문에 젊은 배우들과 이물감이 느껴지지만, 마치 다른 시대를 사는 것 같은 강수연만의 연기는 <정이>가 이야기하는 낯선 풍경의 중심이 된다.
1980년대 베니스 영화제,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를 우리는 월드스타라 불렀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영화제 수상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진짜 영화가 있다는 걸 널리 알렸지만, 사실 전 세계의 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 2023년 그녀의 유작이 된 넷플릭스 영화 '정이'가 드디어 진짜 전세계 스트리밍 1위를 했다. 월드스타라는 호칭에 걸 맞는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강수연다워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강수연은 극장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극장이 아닌 곳에서 만난 강수연의 유작이라니 좀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이렇게라도 강수연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정이>는 강수연을 새긴 시절의 기록으로 남았다. <정이>의 마지막 대사는 그간 우리가 강수연에게, 혹은 강수연이 강수연 자신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같다 자꾸 곱씹게 된다.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요. 자유롭게 살아요…….이 세상 모든 행운이 함께 하길……."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