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리뷰
이대로 살아도 좋을까, 묻게 되는 순간은 대부분 그렇게는 살면 안 되는 순간인 경우가 많다. 가장 소중한 이를 놓쳐버렸을 때, 상실감은 우리를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로 만든다. 태어났으니 당연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살아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실존적 질문과 만났을 때 마음에는 깊은 흉이 진다. 흉이 진 마음은 아무리 펴보려 해도 흔적이 남는 구겨진 종이 같다. 하지만 종이의 주름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이 접힌 곳을 따라 걷다보면 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오래된, 오랜 이야기
1910년대의 이탈리아,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아들 카를로와 함께 살던 목수 제페토는 마을 성당의 예수 목상을 제작할 정도로 인정받던 장인이었다. 예수 상을 작업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이 성당에 떨어져 카를로는 안타깝게 희생되고 만다. 제페토는 카를로가 남긴 솔방울을 무덤 옆에 묻어두고 매일 술독에 빠져 살게 된다. 솔방울은 어느 날 소나무가 되었고 술에 취한 제페토는 소나무를 베어 피노키오를 만들게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이하 ‘피노키오’)’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로, 애니메이션 감독 마크 구스타프슨과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원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어린이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피노키오의 모험 Le avventure di Pinocchio』이다. 원고료 지급 문제로 연재물은 강도가 피노키오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독자들의 항의로 결말을 수정하여 1883년 단행본으로 발표하였다.
콜로디의 작품을 원작으로 우리에게는 피노키오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것은 1940년이다.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의 아이콘이 될 만큼 디즈니의 작품은 아름답지만, 19세기 유럽 아동문학이 가지고 있는 가학성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실존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예쁜 이야기 뒤로 숨겼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흔히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기 보다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감독은 오래 되었지만 낡지 않고, 그 가치를 오랫동안 이어온 원작의 가치를 잘 살려내었다. 원작이 가진 정치적 함의와 피노키오라는 기이한 생명체가 겪는 차별, 빈곤, 계급 갈등, 종교문제, 전쟁, 아동학대 등 원작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거르지 않고 다 보여준다. 그 속에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얹는다.
최근 디즈니에서 공개한 실사판 ‘피노키오’가 우물쭈물하는 어정쩡한 분위기였다면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극적으로 살린 무척 새로운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피노키오는 영생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 파시스트 정권이 원하는 불멸의 존재라는 설정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가 스페인 근현대사의 은유였던 것처럼 ‘피노키오’는 파시즘과 기독교, 가난해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권력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나로 살아보려는 결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인형이 움직임을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촬영하여 이어붙인 애니메이션을 말한다. 말 그대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것처럼 무척 수고롭지만 그만큼 결과물은 애쓴 만큼 아름답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피노키오만 진짜 목각인형이다. 나머지 인형은 인간의 모습을 한 인형이다. 진심과 성심을 다하는 제작방식과 진짜 사람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영화의 메시지가 찌릿할 만큼 딱 맞아떨어진다.
‘피노키오’는 당장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촉각의 감각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프레임을 이어붙이는 방식이라 움직임이 다소 끊어지는 듯한 스톱모션의 단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실사영화 혹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낯설 정도다. 게다가 ‘피노키오’는 단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작곡한 음악에 세계적인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한 뮤지컬이다. 순간순간이 기묘해서 아름답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사람은 아닌 피노키오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격을 부정 당한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인 피노키오를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용하려고 든다. 피노키오를 지켜야 할 또는 지키고 싶은 선량한 어른들은 막상 그를 지킬 힘이 없다.
피노키오의 영생이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능력이다. 삶과 죽음이 딱 끊어지는 대척점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기예르모 델 토로는 밝은 빛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마주하는 법을 알려준다. 꼭두각시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까지, 몇 차례의 죽음과 새 생명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도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 대신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삶과 죽음의 가치와 그 경계 사이의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철학적 사유를 중심에 둔다. 피노키오는 결국 영생이 아니라, 홀로 우뚝 제 자리를 걷는 힘을 발견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현재의 내 모습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한다.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나로 인정받고 나로 살겠다는 피노키오의 결심은 마치 기적처럼 단단해서 믿음직스럽다.
P.S
‘피노키오’를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시작시점에 넷플릭스 제공이라는 타이틀에 당황했을 수도 있다. 12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스트리밍 되지만, 국내에서는 CGV와 넷플릭스의 협력에 의해 스트리밍 전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여러 영화사에 기획안을 넘겼지만 오직 넷플릭스만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콘텐츠가 영화의 구원이 될지 재앙이 될지 아직 미지수인 것 같다.
[OST 정보] Music by Alexandre Desplat / Netflix Music
영화음악의 거장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만든 음악은 당장 무대에 올려도 좋을만큼 귀에 감긴다. 목소리 연기를 맡은 배우들의 실력도 출중하다. 피노키오 역의 그레고리 만은 물론 이완 맥그리거, 틸다 스윈튼, 케이트 블란펫 등 세계적인 배우들이 인형의 움직임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