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뷰
모래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발자국도, 떠들썩하게 사람들이 놀다간 흔적도, 예쁜 아이들이 몇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모래성도, 물이 마르고 바람이 불면 다 사라지고 바스러지는 모래만 남는다. 그렇게 모래는 어떤 것도 숨겨주지 않는다. 반면에 진흙은 외부의 이물질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살 속으로 잘 숨겨준다. 얼핏 잘 숨겨주는 것 같지만 진흙은 꼭 끌어안고 있다가 누군가 헤집으면 툭 하고 뱉어낸다. 만약 비밀을 숨겨야 한다면 모래에 숨겨야 할까? 진흙에 숨겨야 할까?
습지의 소녀
196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마을 늪지대에서 청년 체이스(해리스 디킨슨)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들은 습지 소녀라 불리며 야생에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거존스)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한다. 카야가 어린 시절, 카야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카야만 버려두고 가정 폭력범인 아버지에게서 모두 달아난다. 아버지마저 카야를 떠나자 그녀는 습지에 방치된 채 홀로 살아간다. 카야에게 글을 가르치고 생물학자로서의 가능성을 독려하는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가 대학 진학을 이유로 떠난 후,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이스가 카야에게 다가온다.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알려진 것처럼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소설은 2018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뉴욕타임스 182주 베스트셀러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원작자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학을 전공한 생태학자이자 환경보호론자이다. 그녀는 실제로 2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야생 생물을 관찰, 연구했다고 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줄곧 환경을 연구하고 관련 도서를 집필하던 그녀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지은 첫 번째 소설이다. 서정적이고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생물학적이고 철학적인 생존의 심리가 앞서서 잘 그려진 이유다.
할리우드의 배우이자 제작자인 리즈 위더스푼은 원작 소설에 반해 영화의 판권을 구매하는 것은 물론,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한 야생 소녀의 멜로에 미스터리 스릴, 그리고 법정 영화의 장점까지 모두 녹여낸 영화의 다양한 구성 덕분에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달짝지근한 로맨스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잘 어울리는 영화다.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지만, 어느 것 하나 뾰족하게 튀어 오르지 않고 잔잔한 늪지처럼 잔잔하고 뽀얗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혼자 살아남은 카야에게 사람들은 불친절하다. 그녀는 홀로 버려진 후 습지의 조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여린 속살을 꽁꽁 감추고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개는 카야를 닮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친절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테이트와 가게를 운영하는 마벨 부부만이 카야를 품는다. 변호사 톰은 어린 시절 모두가 외면한 카야에게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테이트와 마벨 부부, 변호사 톰이 카야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낯선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운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카야를 배려하지만, 야생의 삶을 선택한 카야를 세상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들의 방식을 강제하지 않는다. 카야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와 그녀를 헤집어 놓은 테일러, 혹은 그녀를 원시인 취급 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마을의 방관자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삶이라는 흔적
생물학자가 지은 소설인 만큼 주인공 카야의 삶을 통해 인생의 근원적인 고독, 대자연 속의 생존이라는 원초적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이것은 소설을 이끄는 이야기의 근간이 된다. 영화는 철학적 이야기가 눅진하게 가라앉은 원작이라는 늪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매끈한 스토리 라인을 길어 올린다. 그래서 영화의 뼈대는 두 남자와 카야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 아쉽게도 영화에서 카야가 야생 소녀로 생존해 온 성장의 이야기와 그 근간이 되는 늪의 서사는 사라졌다. 소설 속 카야가 늪지 생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종의 생물학자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종차별과 계급사회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도 될 수 있으면 지운다. 차별과 멸시의 차가움을 덜어낸 영화는 무난한 온도로 잘 삼켜지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원작 속 여성의 자존과 자립, 습지를 벗어나 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대신 원작에서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나니, 카야의 성장 이야기도 진한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카야의 삶을 비극적 정서로 강제하거나 카야의 삶 자체를 전시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 속 카야는 훨씬 대하기 쉬운 캐릭터가 되었다.
서정적인 분위기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배우들의 무난한 연기와 적당한 반전 등 평이하다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또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영화는 꾹꾹 눌러써야 하는 글자들을 진흙이 아닌 마른 모래 위에 쓴 것처럼 어느 하나 또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는 생존에 대해서는 무척 단호하게 카야의 손을 들어준다. 야생의 생명력을 지키려는 생존의 본능이 도덕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작의 핵심만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습지에는 아주 많은 생명체가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카야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습지 생명체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는 타고난 생물학자다. 습지 생명체는 중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수를 상징한다. 그렇게 함께하지 않는 삶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좀 더 농도 짙은 화두는 원작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OST 정보] Music by Mychael Danna / Universal Music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와 골들 글로브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마이클 대나가 ‘Carolina’를 제외한 전곡을 작곡했다. 서정적인 작품이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갖춘 영화의 정서를 음악으로 오롯이 표현하면서 극의 긴장감과 서정성을 강조한다. 원작 소설의 팬이라고 밝힌 테일러 스위프트가 직접 작곡한 ‘Carolina’는 늪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정서와 서정을 마치 노래 한 곡에 다 녹여 넣은 것처럼 영화와 잘 어울리는 신비로운 곡이다.
1. Carolina – Taylor Swift
2. Out Yonder Where The Crawdads Sing – Mychael Danna
3. A Swamp Knows All About Death – Mychael Danna
4. They Called Me Kya – Mychael Danna
5. The Marsh Girl – Mychael Danna
6. Mussels For Jumpin’ – Mychael Danna
7. A Feather From Tate – Mychael Danna
8. Am I Your Girlfriend Now? – Mychael Danna
9. Snow Geese – Mychael Danna
10. Another Season Passed – Mychael Danna
11. You’re Never Going To Come Back – Mychael Danna
12. The Fourth Of July – Mychael Danna
13. View From The Fire Tower – Mychael Danna
14. Clothes From Miss Mabel – Mychael Danna
15. Chase Andrews – Mychael Danna
16. Red Wool Fibers – Mychael Danna
17. I Just Wanna Talk – Mychael Danna
18. With Royalties To Follow – Mychael Danna
19. We The Jury – Mychael Danna
20. It Was Always Tate – Mychael Danna
21. I Am Every Shell Washed Upon The Shore – Mychael Danna
22. Teach You To Read – Mychael Danna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