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로 꾹꾹 눌러 쓴 20개의 이야기

소라 네오의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리뷰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04.jpg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 스틸 컷

코다(coda)는 이탈리아어로 꼬리라는 의미로, 음악에서는 한 악곡이나 악장에서 끝맺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이는 악구이다. 문학에서도 앞부분에서 제시된 테마나 모티브를 강조하거나 요약하는 장을 코다라 부르는데, 일종의 에필로그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삶에 ‘코다’라는 표기를 남겨 내 삶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요약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코다 기호를 어디에 찍어야 할까? 글로 기록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어느 시점을 불러와 요약해야 할까? 끝을 앞둔 순간에 마침표를 경쾌하게 꾹 찍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말줄임표로 미련을 남겨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 같기는 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코다

긴 부연설명 없이 몇 개의 수식어만으로 그 사람의 삶, 심지어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류이치 사카모토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문득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그리고 문득 일상을 살다가 우연히 들리는 음악을 통해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네오 소라 감독의 ‘류이치 사카모토:오퍼스’는 암 투병 끝에 지난 2023년 3월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담고 있지 않지만, 내밀하고 사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는 영화의 연출을 맡은 네오 소라 감독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빛과 소리를 통해 평생을 지켜봐 왔을 아버지이자 위대한 예술가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회화처럼 그려낸다.

사적인 이야기 한 마디 없이, 사적인 호기심을 채우거나 죽음을 앞둔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도 없이, 오롯이 피아노와 류이치 사카모토를 하나의 심장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준다. 다양한 음악의 변주를 통해 각기 다른 생명체를 만든 그가 피아노라는 오롯한 근원으로 돌아간 순간을 담는데, 명암이 선명한 흑백 필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혼까지 찍힌 것 같다.

굳이 명명하자면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다큐멘터리의 느낌을 담은 콘서트 영화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사람의 삶이 궁금한 관객들은 중간 중간 설명이나 인터뷰를 기다리겠지만, 잠깐 쉬어가자는 몇 마디의 대화를 제외하고 영화는 20곡의 음악을 연주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피아노, 그리고 두 생명체가 만들어 내는 20개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흔한 이야기 하나 없이 우리는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한 사람을 오롯하게 느낀다. 그의 음악은 몽타주처럼 하나로 응축되고, 빛으로 해가 저물고 떠오르는 순간을 표현하듯 1번째 연주에서 마지막 연주로 이어지는 모든 순간이 그의 삶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가깝게는 제작자인 아내와 감독인 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이면서, 더 넓게는 전 세계 음악팬에서 남기는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사람의 코다 같은데, 그 자체만으로도 울렁이는 감동이 된다.


영원한, 마지막 콘서트

암 투병 중 죽음을 감지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는 마지막 콘서트를 기획하는데 그 콘서트가 바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이다. 2022년 9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촬영하였다. 하루에 2-3곡을 2-3번의 테이크로 촬영했고, 사카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이라고 평했다는 NHK 509 스튜디오에서 미세한 숨결까지 담아낸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직접 선별한 20곡의 음악은 그의 삶의 흔적이자, 주름 같은 것들이다. 그는 선곡부터 편곡과 녹음 과정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의 음악이 오롯이, 제대로 필름에 기록되도록 하였다. 네오 소라 감독은 다양한 각도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표정, 연주하는 손, 연주하는 몸, 그리고 그와 대화하는 또 다른 주인공인 피아노를 대비가 선명한 흑백 영상으로 기록했다.

네오 소라 감독은 음악보다 앞서거나 음악을 왜곡하는 편집이나 촬영기법 없이, 연주와 음악,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예술가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콘서트 현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낀다. 어쩌면 흑백 필름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에 집중하면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손가락과 연주할 때 미묘하게 확장되는 혈관, 그의 호흡, 피아노의 질감을 촉각처럼 느끼게 하는 촬영은 어떤 점에서 미술관에서 만난 영상 작품 같기도 하다.

음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살아있지 않지만 희한하게도 공기와 만나면 생명처럼 살아난다. 관객들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순간 피어나는 20개의 생명과 만난다. 그리고 음악에 담겨있는 그의 이야기와 삶, 눈물과 숨결을 함께 느낀다. 네오 소라 감독은 가끔 연주와 연주 사이, 힘들어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 삶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음악이라는 생명체는 약해지지 않고 생생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둔 회한이나 삶에 대한 집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담담하고 섬세한 그의 이야기는 음악이라는 유기체, 그 생명과 핏줄처럼 이어진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류이치 사카모토는 영원히 자신의 흔적을 우리의 삶에 공기처럼 남겼고, 그의 음악은 영생이라는 인간의 꿈을 세상 모든 곳에서 실현시킨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는 곳에서 그는 다시 살아나고, 그의 음악이 담긴 영화 속에 혈관처럼 유영한다.


모든 곡이 좋지만 유작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 담긴 ‘아쿠아(aqua)’는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졌던, 묵직한 질문을 우리의 등과 머리와 어깨에 계속 짊어지우면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번 영화 10번째 음악으로 다시 만나는 순간, ‘괴물’이 던진 슬픔, 우울함,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던 그 질문들이 다시 환기되는 것을 느낀다. 이외에도 우리가 영화에서 만났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통해 그의 음악과 함께 했던 우리의 시간, 그 날의 감촉, 그 때의 기억도 그의 연주와 함께 피어나는 것 같다.


[set-list]

별도의 OST가 발매되지는 않았고, 영화를 통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최상의 음향시설이 갖춰진 돌비 애트모스 영화관에서 그의 마지막 콘서트를 관람하기를 권한다.


01. lack of love

02. BB

03. andata

04. solitude

05. for Johann

06. aubade 2020

07. ichimei-small happiness

08. mizu no naka no bagatelle

09. bibo no aozora

10. aqua (note: the sequence with “piano tuning break”)

11. tong poo

12. the wuthering heights

13. 20220302-sarabande

14. the sheltering sky

15. 20180219(w/prepared piano)

16. the last emperor

17. trioon

18. happy end

19. merry christmas Mr.Lawrence

20. opus-ending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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