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영화관을 갔을 때, 기억이 난다. 조그만 TV만 보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화면에 압도당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의 극장을 기억는 사람은 알겠지만 맨 앞 좌석에 앉으면 눈이 빙빙 돌 정도로 스크린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당시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많아서 시장처럼 시끄러웠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화면이 시작되자 웅성웅성대던 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대한극장' 이미지 사진
물론 영화가 아니라 '대한뉴스'가 먼저 시작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건 하나의 충격이었다. 마치 오즈 나라에 간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쾅 쿵쾅 요동질을 친다는게 이런거구나,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사는 답답한 세상은 문을 닫고, 새롭고 화려하고 매끄러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날 이후 지금도 여전히 극장에 앉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2017년 여름이었다. 엄청 마음이 부산스러운 것과 달리 기분은 좀 권태롭고 울적한 그런 오후였다. 언제나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영화의 일부라도 되고 싶었던 나는, 자주 영화를 검색했다. 그날도 영화 기사 검색을 하다 우연히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신인 평론상 공모를 한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습관처럼 영화를 본 후 짧게 적어두던 감상평과 영화에 관한 노트들이 꽤 쌓여있었으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써봐도 좋겠다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해, 운 좋게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하였다.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던 나를 발견해준 영평상처럼, 나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작은 영화를 발견하는 그런 영화평론가가 되자, 결심했다. 작은 영화의 이야기가 나를 닮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영화가 좋았다. 내게만 속삭이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는 않는 말. 멍 자국 위를 꾹 누르는 나쁜 손. 맨살에 입은 거친 옷. 로션 안바르고 나온 날 맞은 칼 바람. 하여 더 아프고 더 지쳐 주저앉은 뒤에서,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등짝을 빵 차주는 그런 것이다.
나는 작은 영화를 많이 알리고 싶었다. 내 삶처럼 마냥 선량하지는 않은, 마냥 지 얘기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위한 말 한마디는 지닌 무뚝뚝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를 평가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영화를 통해 얻은 감각으로, 에세이처럼 영화를 읽어주고 싶었다. 모래알처럼 작지만, 또 볕을 곁에 두어 반짝이는 우리 삶을 닮은 영화를 보고,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줄곧 우리가 다양성 영화라 부르는 아주 작은, 아주 다양한, 아주 다채로운 영화들만 찾아보았다. 영화평론가로 등단한지 5년차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유명하지는 않은, 그냥 작은 영화평론가로 살고 있다. 작은 영화를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면 나 자신이 조금은 유명해져야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성 영화를 선호하면서 상업 영화와 다른 장르의 영화를 잘 찾아보지 않다보니 다양성의 영역이 확장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영화를 추천해주지만,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작품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작품들 위주라 오히려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영화를 편식하는 내 습성 때문에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도리어 영화를 추천받는 어떤 순간, 나도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넓혀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추천을 해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영화를 봐야겠다 생각했다.
찾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에 개방된 아주 많은 ott에도 숨겨진 좋은 영화들이 꽤 많다는 걸 최근에 발견했다. 다양성의 다양성을 넓히기 위해, ott를 찾아보고 ott를 통해 쉽게 만날 수 있는 좋은 영화를 추천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ott의 표지에서 길을 잃은 아주 많은 영화 관객들이 쉽게 영화에 다가갈 수 있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