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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Nov 11. 2024

해는 졌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 리뷰

<한국이 싫어서> 포스터

사는 게 때론 소동 같다. 털털대며 겨우 달리던 차가 갑자기 털썩 퍼져버린 것처럼,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단단하다 믿었던 발목이 삐끗한 것처럼, 우리는 원하지 않는 시간, 원하지 않는 순간에 우뚝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삶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을 느낀다. 겨우 힘을 내어 일어나 다시 움직여 본다. 이제 벗어났나 하면 다시 자갈길이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나 싶으면 다시 샛길이다. 그 흔한 지름길 한번 나타나 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털썩 주저앉아, 이제는 멈춰야겠다, 하는 순간을 만난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고아성)는 제목처럼 그냥 한국이 싫다. 20대 후반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니, 한국에서의 삶은 절망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 여전한 직장에서의 차별을 겪으면서 그녀는 한국에서 사는 것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좀 안전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헛된 희망 같다. 그녀의 오랜 연인 지명(김우겸)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 조차도 그녀에게 꿈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계나는 훌쩍 달아나듯이 뉴질랜드로 간다. 친구의 장례식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계나는 한국에 머물지,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갈지 고민한다.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출간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한국의 떠나려는 청춘을 통해 한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리의 청춘들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고민하고 선택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삶과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교차로 보여주는 영화적 형식 속에 한국의 삶은 지옥이고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구원처럼 대비해서 그리지 않는다. 거 봐라, 뉴질랜드라고 별 거 있냐 하는 식의 판단이나 한국에서도 잘 살 수 있다더라, 하는 식의 계도적 시선도 없다. 어떤 삶이 더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운지 관객들이 판단할 수 있게 객관적이고 덤덤한 시선을 유지한다. 


적당한 학교를 졸업해서 남들이 보기에 적당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계나는 주춤거리는 삶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삶을 닮은 계나는 갑자기 발목을 잡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거나 성장하지 않는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사건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딱히 절망이지도 희망이지도 않다. 호들갑을 떨지 않고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삶도 사람도, 그리고 그 속의 관계도 언제나 물처럼 흐른다. 계나는 자신의 시간을 버티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한다. 


돌아보면 사실 우리의 삶은 습기가 많은 화장실 거울 앞처럼 선명했던 적이 없다. 가끔은 아주 건조한 햇살 아래 선 것처럼 따갑고 목이 마르다. 그냥 저냥 살만하다가도 월컹대는 시간이 때론 어지럽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의 아픔을 들여다보지만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려, 통곡하는 시간을 관객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모든 순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계나가 겪는 모든 순간들이 우리의 마음에 후다닥 닥쳐와 위로가 되는 순간과 만난다. 


사실 우리는 이제는 멈춰야겠다, 하는 순간에 진짜로 멈춰선 적이 없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내려서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바퀴가 터지면, 내려서 뛰고, 뛰다가 심장이 벌렁거려 멈추더라도 우리는 걸어간다. 지름길이 없어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조금씩 움직이고 변한다는 걸 우리는 희망이라 불러왔다. 우리의 삶은 매일 그 모양을 바꾸는 달처럼 찌그러졌다가도 어느 날은 활짝 부풀어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니 당장 지금이 반짝이는 것 같아도, 당장 내일이 고달플 것 같아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난 주인공처럼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굽이굽이 접힌 마음을 따라 걷다보면,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어제의 해는 졌지만,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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