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파란 시간이었다고, 그립다고 말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이 시작되었던 시간이다. 꿈만 꾸기엔 어리지 않고, 꿈을 접기엔 너무 이른 나이. 성인이 된 척 폼을 잡았지만 사실은 아직 세상을 잘 몰랐던 시간들. 이제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자꾸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 같던 시간, 모든 시간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데드라인이 시작된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는 뜨거운 질문지는 뙤약볕 아래 자갈처럼 뜨거워 찬물을 끼얹어도 쉬 식지 않고, 불을 붙이려 해도 절대 불타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한때 청춘이라 불렀던 시절이다.
전형적이라 더 진짜인 이야기
자유분방한 차림과 행동으로 남녀 모두의 시선을 끄는 재희(김고은)와 그런 그녀에게 눈길은 가지만 딱히 관심은 없는 흥수(노상현)는 이태원 클럽에서 만난 이후, 둘을 둘러 싼 소문을 공유하면서 결국 친구가 된다. 연인보다 더 뜨겁고, 친구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다가 결국 흥수는 재희의 집으로 들어와 동거를 시작한다.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숨겨야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아주 파랗게 미래가 열린 것 같지만 과거에 갇혔던 묘한 시절, 우리가 청춘이라 불렀던 그 시절 속으로 관객들을 초청한다. 뜨거웠던 몸과 차가웠던 마음이 주체할 수 없었던, 아파서 청춘이었던 시절이 아니라 청춘이라 아팠던 그 시절이다. 과거를 추억하기 보다는 청춘을 재현하기 위해 설정된 아주 가까운 과거는 말랑말랑한 낭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한 때’였던 청춘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어떤 면에서 무척 전형적이다. 자유분방한 여자와 동거하는 속 깊은 게이 남성의 우정. 자유로운 여자는 난잡하다는, 게이 남성은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편견에 가득한 세상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들. 우정 보다 더 진한 두 사람의 사랑은 기본 값으로 두고 그 사이 두 사람에게 나타난 연인 등. 우리가 흔히 보고 듣고 이야기하던 에피소드와 기대 가능한 결말로 이어진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의 전형성은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드는 묘한 진정성을 담고 있어 뻔하지 않다. 이언희 감독은 생생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촘촘하게 이야기를 엮어내고 김고은과 노상현은 재희와 흥수라는 캐릭터가 느끼는 통증과 설렘, 고민과 성장을 이끄는 감정을 진짜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특히 재희의 결혼식에서 노상현이 부르는 미스 에이의 ‘배드 걸 굿 걸’은 재희의 서사를 노랫말로 그대로 담아낸 것 같다. 원작을 볼 때는 영상으로 만들면 살짝 낯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장면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게 영화의 가장 예쁜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진짜라 더 전형적인 판타지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70페이지 정도의 단편 ‘재희’의 파트를 원작으로 한다. 함축적으로 표현된 소설의 에피소드를 원작과 다르게 확장하거나 인물의 서사를 단단하게 각색한 부분이 영화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원작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한다면 영화는 성소수자 혐오와 자유분방한 여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여전히 유령처럼 남아있는 유교적 잔재 등 사회적 편견 속에 재희와 흥수를 놓아두면서 더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엮어서 묘한 통증과 대리만족을 함께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사실 어느 시절,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딱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 그런 차별을 당연하게 과시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백 그라운드로 깔고 그 속에 주인공을 부려둔다. 아웃팅과 성착취물 등 개인을 공격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녹였다.
재희의 집은 그 시절을 겪어온 우리 모두의 판타지였다. 부모에게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 사는 투 룸. 독립적이고 화려하진 않지만 궁색하지도 않은 적당한 공간이다. 그 속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판타지는 우리가 청춘 시트콤에서 흔히 보아오던 모습이다. 대학생부터 사회초년생, 결혼을 고민하는 30대 초반까지 재희와 흥수의 서사만이 아닌 청춘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고 모두 느꼈고 모두 고민했을 시절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면서 그 시절 속의 나를 불러들인다.
속 깊은 게이 친구와 자유분방한 여자 친구라는 판타지 속에 재희는 흥수에게, 흥수에게 재희는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람, 우리가 흔히 말하고 원하는 영혼의 단짝이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있을 법하지만 현실에서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가 바라는 판타지이지만, 재희와 흥수는 청춘이 아팠던 우리 자신과 닮아서 우리의 청춘을 자꾸 현실로 소환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자꾸 나의 청춘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 시절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조금 퇴폐적으로 놀기도 했고, 못난 나 자신을 들킬까 겁이나 예민하게 사람들을 밀어내기도 했다. 그런 우리를 닮아서 못나 보이기도 하고 무척 사랑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가장 나다운 것은 뭔지,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어떤 건지 고민하고 그 고민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하지만 또렷한 발자국은 남지 않고 마음만 종이처럼 구겨졌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그 구겨진 종이를 펼쳤더니 청춘의 흔적이 길처럼 남아있더라. 파랗게 아팠고 찬란하게 푸르렀던 시절의 흔적이다.
[영화음악 정보] SLL 제작 / 프라이머리
프라이머리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온라인
샘김, 스텔라 장 등이 참여한 OST는 자유분방한 재희와 디스코, 알앤비, 하드락 등 21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정서를 잘 풀어낸다. 원작에서는 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재희에게 불러주는 노래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인데, 영화에서는 흥수라는 이름을 가진 노상현이 직접 미스 에이의 ‘배드 걸 굿 걸’을 부른다. 소설에서는 핑클 노래가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에서는 미스 에이의 노래가 신이 한 수가 되었다. 아주 살짝 서툴지만 꽤 멋진 노상현의 노래와 춤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