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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Oct 14. 2024

딸 바보와 바보 아빠, 그 사이의 어딘가

영화  <트랩> 리뷰

영화 <트랩> 포스터

1999년 <식스 센스>는 전 세계 공포 영화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후 영화들은 모두 반전 강박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단 한 번의 반전을 위해 억지를 쓰는 영화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식스 센스>가 주었던 충격과 신선함을 따라잡은 영화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식스 센스>를 뛰어 넘어야 할 사람은 바로 샤말란 감독 그 자신이었다. 관객들의 기대치는 너무 높아졌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더 강한 한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은 오래 지속되었다. 


최근 개봉된 영화 <트랩>은 여전히 샤말란이 과거의 명예와 현재의 커리어 사이에서 움찔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소 불안해 보이는 영화다. 딸과 함께 유명 팝스타(살레카 샤말란)의 콘서트 장을 찾은 다정한 아버지 쿠퍼(조시 하트넷). 인파 속에서 딸(아리엘 노도휴)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그는 콘서트장 일대에 배치된 특수부대와 경찰 인력을 보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관계자에 접근해 이 모든 상황이 12명을 토막 살해한 연쇄살인마 ‘도살자’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런데 쿠퍼는 바로 경찰들이 찾고 있는 연쇄살인마이다. 그는 잡히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민다. 


샤말란 감독은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고 숨겨진 것이 훨씬 더 무섭고 소름 돋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자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인 쿠퍼와 연쇄살인범 사이에서 오직 관객만이 그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눈치 챈 순간 긴장과 공포는 극에 달한다. 하지만 그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들키는 동안 빼곡했던 긴장감은 느슨해진다. 주인공이 동정할 여지가 없는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관객들은 갈등하게 된다. 악인인 그가 얼른 잡히기를 바라는 건지, 그래도 탈출하기를 바라는 건지 관객들은 헷갈리고 도덕적 딜레마에 사로잡힌다. 온전히 아빠를 믿고 있는 딸의 관점에서는 그가 사실은 연쇄살인범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고, 또 온전히 아빠를 믿고 있는 가족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얼른 그가 잡혀 가족들이 안전하기를 바라게 된다. 


<트랩>은 스타일에 대한 집착도 줄이고, 강박적 반전에도 집착하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팝 스타 콘서트 장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악인과 프로파일러 사이의 두뇌게임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강렬한 한 방 대신 차곡차곡 쌓인 드라마가 풀어주길 바라는, 가족 간의 문제와 학대 받은 아이의 정신적 문제는 방치된다. 누구를 벌하고 누구를 용서해야하는 지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없다는 것도 아쉽다. 매번 완성도와 작품성이 널뛰기를 하지만 미국 사회 속 아시아인으로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자라온 환경 덕분에 그는 늘 자신의 영화 속에 인간과 사회, 소외된 자와 사회 간의 소통을 일관성 있게 담아냈다. 반전 강박 속에서도 그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개인의 단절감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트랩>에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아빠가 사라진 가정에서 아이들은 살아남아야 하는 법을 고민해야 하고, 아빠를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존재로 남겨둬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영화의 전반부를 이끌었던 딸의 역할이 후반부에 가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실제로 팝스타 역의 샬레카 샤말란이 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오는 순간 <트랩>은 진짜 덫에 빠지고 만다. 주변부의 인물이었던 샬레카에게 영화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자리를 선물하기 위해 이야기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딸 바보 샤말란 감독이 진짜 바보 아빠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이 반전 없는 이 영화의 진짜 반전이 아닐까 싶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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