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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Sep 30. 2024

서로의 소리를 듣고, 동그랗게 손을 잡다

나루시마 이즈로의 '52헤르츠 고래들' 리뷰

'52헤르츠 고래들' 스틸 컷

숨은 쉬지만 결국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툭 끊어진 채로 더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무기력해진 나에게 사람들은 자꾸 힘을 내라 부추기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거라 말한다. 악의 없는 무책임함은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어쩌면 인생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때, 절박할 정도로 지독하게 살고 싶었다. 그 절규를 단 한 사람만이라도 들어준다면 나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죽었던 날

상실의 아픔을 간직하고 바닷가 마을로 이사 온 키코(스기사키 하나)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받으면서 자랐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닮은 소년(쿠와나 토리)을 만난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온 몸으로 구원을 이야기하는 소년의 외침을 키코는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키코는 과거에 자신의 외침을 듣고 그녀의 삶을 구원해준 안고(시손 쥰)를 떠올리며 자신도 소년을 위기에서 구하려 한다.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 시리즈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마치다 소노코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52헤르츠 고래들’은 ‘솔로몬의 위증’,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로 잘 알려진 나루시마 이즈루 감독의 작품이다. 앞서 원작이 있는 작품을 섬세하게 영상화해 온 감독은 원작의 이야기를 잘 살려 52헤르츠 고래를 닮은 세 사람을 통해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 또 다른 캐릭터이기도 한 바닷가는 깊고 아름다운 감성과 풍광을 담아야하기 때문에 원작 소설의 배경인 오이타 현에서 실제로 촬영했다. 살기 위해 바닷가로 숨어들었다가 누군가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 키코의 마음은 자연을 닮았다. 그래서 이즈루 감독은 마을을 향하는 물결, 그리고 바람의 흐름을 최대한 자연광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기 위해 바닷마을을 찾은 키코의 할머니처럼 키코도 바다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진 못하지만 살기 위해 가족을 떠난 남자 안고는 자살을 하려고 트럭에 뛰어 든 키코를 만나는 순간, 살려달라는 구원의 주파수를 읽는다. 안고가 그랬듯이 키코 역시 소년을 만나는 순간, 지독하게 살고 싶다는, 나를 좀 살려달라는 소년의 애원을 읽는다. 가정 폭력으로 시들어가는 소년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키코는 용기를 낸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엄마의 학대 속에서 새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시들어가는 키코에게 안고는 가족이 저주일 때, 가족을 버려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52헤르츠 고래들’이 가장 강조하고 힘주어 주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죽게 하는 혈연으로서의 가족과는 결별해도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따뜻한 영화의 감성은 가족의 관계와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가 가 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유사 가족이 되어 서로를 품어주며 살아가도 좋다고 말한다.  

 

내가 살게 된 날

물기 없이 건조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거칠어진다. 바스락대며 부서질 것 같은 무관심에 쓸려 생채기가 난 사람들은 사람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다. 나루시마 이즈로 감독은 그렇게 마음이 거칠어진 사람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불러오지만, 그들을 허투루 방치하거나 헛된 희망의 울타리 속에 가두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인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거친 마음과 손을 잡아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 보자고 말한다.

누구라도 들어달라고 외치는 고음역의 헤르츠를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 늘 사람이,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이야기가 있다. ‘52헤르츠 고래들’은 가족 때문에 죽으려고 결심한 날, 영혼의 단짝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키코를 통해 마음이 지치고 흉진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관심을 보여야 하는지 수선 떨지 않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나루시마 이즈로 감독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운 주인공의 발을 따라가면서, 그들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엄마들은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이다. 키코와 소년은 엄마의 가정폭력에, 안고는 엄마의 낙관적 방치 속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살고 있다. 제도와 가정 폭력, 젠더 이슈 등 지금 우리가 듣고 보아야 하는 묵직하고 씩씩한 화두를 담고 시작했지만, 불쑥 끼어든 재벌과의 연애, 갑작스러운 비극의 설정 등 이야기 구성에서 신파적 요소를 덜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키코와 안고의 속 깊은 인연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풀어내지 못한 설정은 조금 아쉽다. 

실제 가족은 낙관적으로 관망할 수가 없다. 지독한 가해자이기도 한 나쁜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늘 질문을 던진다. ‘52헤르츠 고래들’은 유사 가족의 구원이라는 이야기로 손을 맞잡은 구원의 연대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린다. 사실은 키코가 나타나기 전까지 방치되었던 소년이 갑자기 마을 공동체가 품어주는 아이가 된다거나, 세상 가장 아름다운 고래가 등장하는 장면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이다. 

하지만 나루시마 이즈로 감독이 따뜻하게 들려주는 바닷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둘러 해피엔딩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해 오던 가정폭력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 밝은 곳으로 꺼내야 두어야할 이야기를 지금이라도 시작해보자는 제안처럼 보인다. 그래서 뻔할 정도로 착한 이 영화와 숨, 좀, 쉬고 살자하는 캐릭터들을 존중하고 응원해줘야 할 것만 같다. 


[영화음악 정보 

Rambling Records / Yohei Kobayashi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 등 영화음악과 게임 작곡가로 활동하는 요헤이 코바야시가 참여한 OST가 해외에서는 정식 출시되었다. 발매된 OST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영화를 가장 빛나게 하는 주제가는 일본 혼성 록밴드 사우시 독의 ‘Along the Long Journey’이다. 사우시 독은 대표곡 ‘Itsuka’, ‘Cinderella Boy’ 등으로 유튜브 백억뷰 조회수를 기록한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11월 내한을 앞두고 있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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