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키우며 내가 시들어가는 시간에 대하여

린 램지의 '다이 마이 러브'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01.jpg '다이 마이 러브' 스틸 컷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잠든 아이의 솜털 보송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천사처럼 잠든 아이를 안고 문득 찾아온 이 평화가 내 삶의 전부라 믿는다. 다 지나가는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엄마는 인내하고 헌신해야 하는 거라는 타인의 말을 믿고, 나의 모든 시간을 찢어 아이의 울음에 나눠주는 나 자신을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다정한 남편의 위로와 때론 적막한 고요도 즐길만 하다. 지루하게 반복되지만 조금도 쉴 틈 없는 이 순간이 어쩌면 행복인 거라고 믿는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한 여자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르고, 그새 여자라는 이름이 지워진 자신을 재우기 위해 또 자장가를 부른다.

우울증, 침묵의 비명

그레이스(제니퍼 로렌스)와 잭슨(로버트 패틴슨)은 어딘지 모를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와 살다가 아이를 낳는다. 다정한 시부모님이 이웃에 살고 있고, 이웃 사람들도 친절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한적한 스위트홈처럼 보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그레이스는 점점 지쳐가고, 잭슨과의 불화도 깊어지면서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린 램지 감독의 ‘다이 마이 러브’는 흔히 여성이라면 당연히 장착하고 있어야 하는 신성한 것, 이라 여겨지는 모성이 진짜 당연한지 묻는다. 내 몸을 나누어 쓰며 내가 만들어낸 아기가 이제는 내 시간을 뺏어간다는 공포, 살고 싶지만 동시에 사라지고 싶은 충동, 뜨겁게 타올랐던 여자로서의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깨진 유리잔 파편처럼 관객들에게 내던진다.


한때는 서로에게 전부였던 부부 사이에 아이라는 낯선 타자는 축복이자 때론 저주이기도 하다. 린 램지 감독은 부부 사이의 균열로 스며드는 절망과 살의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지, 키워지는지를 질문하면서 엄마의 욕망과 죄의식을 들여다본 램지 감독은 ‘다이 마이 러브’에서는 서사를 아예 지우고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에 집중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파편화된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은 그레이스의 시선이 아니라, 그레이스의 심장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와 동기화될수록 점점 숨통이 조여오는 것을 느낀다. ‘다이 마이 러브’는 친절한 서사를 통해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물의 고통스러운 감각을 함께 체험하면서 같이 아파야 하는 영화다.


아리아나 하르비츠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이 냉소적인 문체로 시골 생활과 산후우울증의 지난한 시간을 묘사하는 건조한 낙엽 같았다면, 램지의 영화는 뜨겁고 탐미적이다. 소설이 죽어가는 여성의 심정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살고 싶어 하는 여성의 심장에 더 가깝다. 하르비츠가 만든 시골이 고립의 장소였다면 램지가 묘사하는 시골은 여성의 숨통을 조이는 거대한 생명체가 된다.


나를 죽여, 다시 살아보겠다

산후우울증을 겪는 그레이스는 무언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 낀 것 같다고 말한다. 산후우울증은 단순한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감정이 맞물려 돌아가며 맷돌처럼 자아를 갈아버리는 일인 것 같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구원하지 못할 때, 자신을 파괴하고 죽이는 행위를 통해 살아보려는 몸부림은 처연하다. 그레이스의 심리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음악은 기묘한 불균형을 청각적으로 재현한다. 린 램지의 영화 속에서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유령이자, 주인공의 내면이 외치는 비명 같기도 하다.


램지 감독은 모두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산후우울증을 아이의 울음소리와 규칙적인 시계, 자연의 소음, 마룻바닥의 삐걱거림 같은 일상 소음과 음악을 뒤섞어 신경질적인 불협화음을 만든다. 의도적으로 고저를 비틀어 놓은 것 같은 소리는 관객들의 평형감각을 위협한다. 평온해야 할 요람의 곁을 날카로운 현악기의 마찰음이 휘감는 것으로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그레이스의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


램지의 영상과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그레이스의 혈관 아래를 기어다니는 불안을 포착한다. 일상의 소음이 신경질적인 현악과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 관객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거대한 스피커가 되어 여자에게 소음의 폭력을 행하는 순간을 묵도하게 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며 끊어지듯, 그레이스는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동시에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으로 부활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엄마의 배역을, 선량한 아내의 역할을 연기하는 대신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한 전쟁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광기와 사랑 사이에서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는, 약해서 결국 악해지고야 마는 한 여자의 이기심을 평가하거나 탓을 하지 않고 일그러진 마음의 모서리를, 그 뾰족하고 거친 감각을 같이 느껴보자고 말한다. 그레이스가 느낀 고립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말은 그레이스 이외의 인물들에게는 비극이다.


낡아 해지는 마음과 스러지는 자존감과 맞서 생존하려는 그레이스의 결심은 혼자 왈츠를 추는 것 같다.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고 호흡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심장에 귀 기울이고 비틀거리더라도 제 발로 서보려는 고독하지만, 삶의 의지를 담은 춤이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 는 모성 신화는 사랑과 모성이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믿게 만들지만 누군가에게 모성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몰락의 시작이기도 하다. 다행히 램지 감독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망쳐서라도 나로 살아보려는 이들의 뒷모습을 향해 그렇게라도 살아가라고 배웅해 준다. 그렇게 떠밀려서라도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걸로 된다는 거친 외침이 또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된다.

[영화음악 정보] 음악: 조니 그린우드, 조지 브제스티카, 라이프 버철

이번 영화의 음악은 린 램지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조니 그린우드(Radiohead)를 필두로, 조지 브제스티카와 라이프 버철이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맷 램지가 적극적으로 선곡 작업에 참여했지만 단순히 기존 곡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제작 초기 단계부터 세 명의 음악가와 함께 사운드스케이프를 설계했다.


음악은 소음보다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주인공의 고립을 드러낸다. 숲의 정적 속에 갑자기 끼어드는 전자음이나 린 램지의 감각으로 선별되고 재가공된 선율의 흐름은, '모성'이라는 신화에 갇혀 질식할 것 같은 공황의 공포를 청각적으로 전이시킨다. 관객의 무의식이 그레이스의 의식과 조우하게 하는 이 음악적 풍경은 단순한 감상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인물의 짓무른 심연을 뚫고 터져 나오는 비명과도 같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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