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퍼즐 여행
실행
신고
라이킷
17
댓글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Ciel Bleu
Feb 08. 2023
48. 이 정도는 되어야
불멸의 미인
얼굴을 예쁘게,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화장을 한다.
화장을 안 한 맨 얼굴로는 바깥출입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지난 몇 년은 마스크 덕(?)에 많은 이들이 맨 얼굴 외출의 자유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 차가 있긴 하겠지만 예쁘게 단장한 얼굴에 호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싶다.
그런데 말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두상의 일부만으로도 최고 미인의 반열에 오른 여인이 있다.
황금 마스크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어머니(계모이긴 하나)이자 파라오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아크나톤'(
Akhenaten:BC
1352-BC1335 재임)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Nefertiti:BC1370~BC 1331)가 그 주인공이다.
'네페르티티'라는 이름마저도 '미녀가 왔다'라는 뜻이라니 대단한 미인이었나 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이집트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이집트 관에는 수천 년 세월을 간직한 거대한 석상에서 장대한 벽화와 미이라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긴 시간만으로도 압도되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얼핏 놓치기 쉬운 부서진 작은 두상이 하나 있다.
메트로폴리탄 이집트관에 전시된 미스터리 한 두상(좌)
얼굴의 일부만 겨우 남아있는 두상이지만 흔하지 않은 재질(옥)이나 기법의 우수성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신분의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3300여 년 전 작품이다.
수천 년 전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사실적 표현 기법이 너무나 현대적이라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주로 사용되던 라임스톤이 아니라 반사되는 유리 같은 표면의 고급 재질인 옥을 사용하고 당시의 기술로는 미스터리할 만큼 사실적인 입술 표현 기법등을 고려할 때 '네페르티티'로 추정되고 있는 걸작이다.
두상의 정면과 측면
이런 해석을 이해하려면 파라오 아크나톤 재임기의 시대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파라오 아크나톤은 천편일률적인 이집트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이다.
아크나톤 이전의 이집트 미술은 몸은 정면을 보고 있고 얼굴은 옆모습으로 그리는 등 사실성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으나 아크나톤 재위기에는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으로 바뀌게 된다.
아크나톤 흉상, 루브르
아마르나 기법이라고 불리는 이런 묘사 방법의 결과 우리는 긴 턱에 아랫배가 볼록 나온, 신 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파라오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
그의 모습이 다른 파라오들의 모습과 다르게 남아 있는 이유다.
아마르나 기법으로 만든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입상, 루브르
고대 이집트는 다신교 국가였다.
아크나톤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일신교를 시작하면서 기존에 '아몬-라' 신을 모시던 신관들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수도를 테베(현재 룩소르)에서 나일강 하류 쪽으로 300km 정도 내려간 아마르나(Amarna)로 이전했다.
이곳에는 아텐 신전 유적이 수 천년 전의 천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태양 신을 위한 신전이다 보니 많은 양의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붕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르나의 아텐 신전 유적지
뉴욕 뮤지엄의 부서진 두상은 태양신을 숭배하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재질의 반사되는 표면이나 노란색 등이 이 두상의 주인공이 태양과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추측케 한다는 해석이다.
아마르나에서 1912년 발견된 그녀와 관련된 유명한 걸작이 하나 더 있는데 기원전 1345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이것도 무려 3300여 년 전 작품이다.
바로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Neues Museum)의 대표 소장품인 이 흉상이다.
베를린 노이에스 뮤지엄의 네페르티티 흉상
전 세계에서 아름다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네페르티티는 아크나톤이 추구했던 아마르나 기법의 최고의 수혜자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기법은 아크나톤의 개혁정책과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시대건 개혁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이집트라고 예외였겠는가?
강력한 신권을 지탱하고 있던 많은 신관들이 아크나톤의 개혁을 그냥 받아들일리는 만무했다.
결국 그는 그의 치세 동안에는 새로운 바람을 이집트 문화와 종교계에 불어넣는 듯하였으나 사후 그의 뒤를 이어받은 어린 왕 투탕카멘은 수도를 지금의 카이로 근처인 멤피스로 옮기고, 다신교의 사회로 회귀하는 정책을 폈으니 말이다.
후세 사람들의 아크나톤에 대한 평도 상반되는 평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그는 신권을 회복하려는 '아몬- 라'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사후에 그에 관한 기록은 역사의 장에서 모두 삭제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가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개혁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로든 장구한 세월과 전통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서라도 변화를 추구하려 했던 그의 신선한 시도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이집트 유물 가운데 아크나톤과 관련된 유물이 유독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작은 두상의 일부지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장대한 이집트 유물들 사이에서도 가히 이집트 관을 대표하는 유물로 손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keyword
해외여행
예술
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