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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Aug 16. 2017

억수로 운 없는 사나이의 성,
보르비콩트

<  왕의 심기를 건드린 재무 장관 >



왕의 심기를 건드린 재무장관


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멀지 않은 곳에 ‘보르비콩트(Vaux Le Vicomte) ’라는 성이 있다. 이 성의 주인은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을 지낸 니꼴라 푸케(Nicolas Fouquet, 1615~1680)였다. 보르비콩트는 베르사유 궁의 모델이 되었을 만큼 아름다운 성이지만 푸케에 관한 슬픈 사연도 깃들어 있는 곳이다.


정원에서 바라본 보르비콩트 성


푸케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 1612~1670) ,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otre, 1613~1700), 최고의 화가 샤를 르 브랑(Charles Le

Brun, 1619~1690)을 동원해 1658년부터 3 년여에 걸쳐 아름다운 성을 지었다. 성을 완공한 성주 푸케는 1661년 8월 17일, 그 운명의 날, 루이 14세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 한마디로, 화려한 집들이를 한 것이다.

푸케는 루이 14세를 융숭히 대접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고전 희극의 거장 몰리에르(Molière)를 초대해 그의 발레 연극 <레 파슈 Les Fâcheux >를 무대에 올리고, 유명 요리사 프랑수아 바텔(François Vatel)에게 훌륭한 저녁 만찬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왕의 질투와 분노를 사고 말았다. 그날 밤 왕은 푸케가 특별히 장식해 놓은 화려한 거처를 마다하고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성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루이 14세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퐁텐블로 성

성 안에서는 타피스리나 벽에 조각된 다람쥐를 자주 볼 수 있다. 다람쥐는 푸케 집안의 상징이다.   푸케는 프랑스 서부의 아름다운 섬 벨일(Belle-ile) 출신 귀족인데 그 지역의 방언으로 다람쥐가 ‘fouguet’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집안의 문장으로 택했는데 의미는 ‘Quo non ascendet?’로 ‘못 오를 데가 어디 있겠나?’라는 뜻이라니 이것 또한 왕의 심기를 많이 불편하게 했다고.


당시 세간에는 푸케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20대의 젊은 왕은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을 방문한 뒤, 그 소문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왕인 자신보다 더 좋은 성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푸케에게 괘씸죄를 적용했다.

파티가 끝난 며칠 뒤, 루이 14세는 푸케를 체포하여 부정 축재 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이때 푸케를 체포한 사람이 뒤마(Dumas)의 소설 <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 >에 나오는 달타냥(D’Artagnan)이다. 소설 속에서 삼총사보다 더 주인공다운 달타냥이 실존 인물이었다니 흥미롭다.


니콜라 푸케                                               다람쥐 문장                                                       달타냥




달타냥(Charles de Batz-Castelmore Comte d’Artagnan:1611-1673) 

    

우리에게는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실존 인물이었다. 프랑스 남서 지역인 미디피레네(Midi- Pyrenees)의 조그만 마을 루피악(Lupiac)에서 태어났으며 루이 14세 때 왕궁 수비대(Musketeers of the Guard)의 대장으로 왕에 충성하는 군인이었다. 1673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니콜라 푸케의 체포를 책임졌던 사건으로 그는 유명세를 타게 되고 뒤마의 소설 속의 인물로 재탄생한 셈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삼총사가 정의의 사도로, 재상 리슐리외는 악당으로 묘사되었지만, 소설에서는 리슐리외가 아주 뛰어난 재상(역사적으로도 그는 매우 유능한 재상으로 인정받고 있다)으로, 삼총사와 달타냥은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된 점도 재미를 더한다.

푸케의 체포 배후에는 재상 마자랭 밑에서 일하던 야심가 콜베르(Colbert,1619~1683) 가 푸케에게 부정 축재 혐의를 뒤집어씌웠다는 설도 있다. 볼테르(Voltaire)는 이 사건을 두고 “8월 17일 저녁 6시에 푸케는 프랑스의 왕이었지만, 다음 날 새벽 2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라고 읊었다고 한다.


얼마 뒤, 푸케의 부정 축재 의혹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루이 14세는 재판의 판결 형량이 가볍다고 생각해 왕의 권한으로 푸케를 무기수로 만들어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프랑스 재판 역사에서 재판 결과를 왕이 임의로 바꾸어 중형으로 다스린 것은 푸케의 경우가 처음이라고 한다. 


성 안에 전시되어 있는 푸케의 재판 장면


이후 푸케의 부인은 추방당하고, 왕은 보르비콩트 성에 있던 값진 물건을 모두 압수했다. 그리고 성을 짓는 데 공헌한 이들에게 베르사유에 이 성보다 더 근사한 성을 지을 것을 명했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의 탄생이 결정된 순간이다.


화려한 파티의 스타 요리사였던 바텔은 겁에 질려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후에 샹티이(Chantilly) 성의 주인 콩데 공에게 발탁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샹티이 성에서 루이 14세를 다시 대접할 기회를 얻는다. 왕의 기분을 풀어 줄 좋은 기회라 생각한 바텔은 최선을 다해 파티를 준비했는데, 이때 오늘날 그 유명한 ‘샹티이 크림’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휘핑크림(Whipping Cream)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샹티이 크림'에 관해 어떤 이는 휘핑크림보다 좀 더 달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의 무딘 입 맛은 둘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지 못했다. 아주 부드럽고 느끼하지 않아 계속 먹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잠깐 주의하지 않으면 지구를 7바퀴 반을 돌아야 하는 극심한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되는, 긴장하고 먹어야 하는 요주의 디저트다.


샹티이 성 카페에서 맛볼 수 있는 원조 샹티이 크림                                                        영화 'Vatel'



그러나 루이 14세가 3,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을 거느리고 오는 바람에 바텔의 노력이 빛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파티 음식이 미흡했다고 생각한 바텔은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당대의 스타 요리사가 '샹티이 크림'만 남기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바텔의 일대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프랑스의 유명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 (Gérard Depardieu) 가 주연을 맡았다. 

한편, 추방당한 푸케의 부인은 10년 뒤 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1680년 남편이 피네홀(Pignerol)의 감옥에서 사망하고 아들도 세상을 뜨자, 1705년에 이 성을 팔아 버린다. 풍비박산도 이런 경우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푸케의 사건이 억울함의 대명사로 꼽힌다고 한다.



전설 속 '철 가면'은 누구?


또 프랑스의 역사나 이야기 등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철 가면’의 주인공이 바로 푸케라는 설도 있다. ‘철 가면’이란 전설 속 수수께끼의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철(실제는 검은 벨벳이었다고 함) 가면을 강제로 착용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그 당시 프랑스에는 철 가면을 쓴 죄수가 전국에 몇 명 있었다. 그의 정체에 대한 소문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라는 설부터 여러 설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무기수 정치범임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푸케는 그가 숨을 거둔 피네홀에 철가면도 투옥돼 있었다 하여 푸케가 철가면이었다는 루머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보르비콩트 성의 지하에는 철 가면이 전시되어 있다. 어딘가 어설픈 모형이지만 보고 있으면 실제 역사의 현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성이다.                                  

                                                                          



 혼쭐난 당대의 거장들


최고의 건축가, 루이 르 보 

우리가 아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베르사유 궁을 비롯하여 루브르의 동쪽 면, 루브르와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 학사원 (Institut de France) , 생 제르망의 생 쉴피스 성당 (Église St.Sulpice:영화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된 성당) , 파리 동쪽에 있는 방센느 성 (Château de Vincennes:푸케도 한때 이 성에 감금되어 있었다)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천재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 

프랑스의 유명한 정원 중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사유 궁, 보르비콩트 성, 샹티이 성, 퐁텐블로 성, 튈르리 정원을 비롯해 콩코드 광장 서쪽으로 쭉 뻗은 샹젤리제 (Champ-Élysées) 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집안 문장은 달팽이다. 












왕이 극찬한 화가, 샤를 르 브랑 

열한 살에 푸상(Nicolas Poussin:프랑스 최초로 국비로 로마에 유학 간 화가)과 당대 쌍벽을 이루던 시몽 부에 (Simon Vouet)의 제자가 된 천재 화가다. 베르사유 궁의 거의 모든 주요 회화가 르 브랑의 작품이고, 잘 알려진 ‘거울의 방’의 천장화가 특히 유명하다.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둘러볼 때는 카트를 타고 다닐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정원이 넓기도 하지만 성을 마주 보고 있는 언덕 위에 우뚝 선 헤라클레스의 동상을 감상하려면 긴 운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거리는 시간 여유 없는 이들에게는 걷기에 좀 무리다. 그러니 카트 빌리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 가성비 좋은 선택이니 염려 말고.

카트를 타고 아름다운 정원의 구석구석을 누비면 무엇보다 성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헤라클레스의 동상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다. 더불어 이 언덕에 오르면 비운의 성 보르비콩트를 멀리서 관망하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 언덕에서 내려단 본 보르비콩트 성




침대가 너무 짧지 않나요?


말메종에 있는 조세핀의 침대


박물관이나 샤토(Château) 투어를 하다 보면 옛 왕이나 왕비, 귀족들이 사용하던 침대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침대 높이에 입이 한 번 벌어지고, 길이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침대 높이는 너무 높아서 작은 받침대를 사용해야 올라갈 수 있고, 길이는 침대라고 하기에 상당히 짧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누워서 자는 것을 몹시 꺼렸다고 한다. 누워 자는 것은 죽은 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겨 앉아서 잠을 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등을 받칠 베개도 여러 개 필요했단다. 유럽의 호텔에 가 보면 필요 이상으로 베개가 여러 개 놓여 있어서 까닭이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샤토 투어의 가이드(정식 면허를 가진 경력 30년의 프랑스 인 가이드였다)가 침대가 짧은 이유를 설명하자, 누군가 옆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작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슬쩍 한마디 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인은 키가 작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물론 체구가 작은 사람도 있지만, 주로 프랑스 남부 지역 사람이 그런 편이고, 파리를 중심으로 북쪽 사람들은 북구 유럽에서 이주한 민족의 후손들이라 체구가 큰 편이다. 따라서 체구가 작아서 침대가 작았을 것이라는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정말로 ‘앉아서’ 잔 것이다.




                    다음 글은 <3. 프랑스 인이 가장 사랑하는 왕, 앙리 4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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