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프랑스의 항구 도시 마르세유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파리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100만이 채 안 되는 마르세유는 이름 만으로도 이방인 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항구 도시다. 그러나 마르세유 기차역을 나서는 여행객들이 갖는 이 도시에 대한 첫인상은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와는 좀 다른 듯했다.
프로방스 특유의 여유로움과 평화로움 대신 어찌 보면 삭막하게 까지 느껴지는 도시의 이미지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프리카를 비롯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이민들이 많아 치안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친구의 말까지 들었던 터라 조금은 심란한 마음으로 마르세유 기차역을 나섰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맞지 않을 확률이 높지 않던가? 이번 여행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기차역을 나서면 복잡해 보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저 멀리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성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르세유의 랜드마크 ‘Norte-Dame de La Garde’ 성당이다. 지중해와 시내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자리하고 있는 성당은 건물의 맨 꼭대기에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금빛 동상이 반짝이고 있는데 굽어보고 있는 마르세유는 물론이고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축복을 주는 의미를 갖는 다고 하니 마음이 급 평온 해 진다.
원래 이곳은 13세기 초에 자그마한 교회가 세워졌던 곳인데 현재의 성당은 1864년에 증축하여 완공된 것이라 한다.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보니 해안을 지키는 봉화대가 있었으며 뱃사람들에게는 뱃길을 알려주는 역할도 겸했던 곳이다. 이 성당은 지은 지 수백 년씩 된 유럽의 다른 성당들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성당인 셈이지만 햇수에 상관없이 지금은 마르세유의 랜드마크가 된 성당이다
마르세유 역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잡는 언덕 위의 성당( Norte-Dame de La Garde)
다른 지역의 오래된 성당들처럼 육중하고 어두운 색이 아니라 화사한 건물의 외관이 파란 하늘, 지중해와 어우러져 새로운 분위기를 준다.
처음 성당 안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도 외관이 주었던 느낌과 같이 프랑스의 전형적인 어둡고 웅장한 느낌보다는 밝고 안온한 느낌을 준다.
로마네스크와 네오-비잔틴 스타일로 지어졌다는 설명을 들으며 스페인 코르도바의 모스크가 연상된 건 왜 일까? 비슷한 색감의 내부 장식 때문인가 보다.
성당 안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성모상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아 주고 있는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이 성당 안의 많은 금속들이 뜯겨나가 녹여지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이때 본당에 있던 성모 마리아 상도 격동의 세월 속에 수난을 피할 수 없었다고.
이것을 몹시 마음 아파하던 조셉이라는 마르세유 출신 선원이 성모상을 다시 만들기로 하고 샤누엘(Chanuel)이란 작가에게 의뢰하여 6년 만에 만들어 1837년 다시 본당에 세운 것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조각상은 틀을 만들어 본을 떠 내는 방식으로 만드는데 이 은 동상은 작가가 일일이 두들겨 만든 것이라 기간이 많이 걸린 거라고 성당 가이드는 동상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야말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만든 동상인 셈이다.
제단 위의 성모와 아기 예수의 은 동상과 코르도바의 모스크 내부
성당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성모상인 '부케를 든 성모(Virgin with bouquet)는 혁명 당시 어디론가 사라졌었는데 후에 경매에 나온 것을 찾아내어 다시 성당 안에 세운 것이란다. 'Norte-Dame de La Garde'란 이름에 맞게 유독 성모상이 많은(모두 5개) 성당이었다.
부케를 든 성모
이 성당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성당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마르세유 시내와 한눈에 들어오는 지중해의 시원한 전망이 아닐까 싶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올려다본 성당과 EU 깃발
전망대에서 내려 다 본 마르세유 구 항구와 시내
시원한 전망을 감상하며 시선을 마르세유 앞바다로 돌리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장소가 기다리고 있다.
마르세유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은 그냥 평범한 섬이 아니다. 섬에 얽힌 몬테 크리스토의 이야기는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흥미로우니 말이다. 마르세유 앞바다의 ‘이프(If) 섬’이다.
마르세유의 구 항구는 수시로 들고 나는 배들의 행렬로 바쁘다. 고기 잡는 배도 있고 개인 소유의 요트도 있지만 무엇 보다도 이프 섬에 있는 ‘이프 성(Chateau d’If)에 가고자 하는 많은 방문객들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바쁘다. 이프 섬은 마르세유에서 거리가 3.5km 밖에 안되어 육지에서도 빤히 보이는 근 거리에 있다.
배에서 바라보는 이프 성
마치 샌프란시스코 만에 있는 알카트라즈(Alcatraz Island) 섬처럼 말이다.
그런데 두 섬은 용도와 명성도 비슷하다. 절대 탈출을 용납하지 않는 감옥이 있던 섬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프 성’은 처음부터 감옥으로 지어진 것이었을까? 아니다. ‘이프 성’은 원래는 방어 요새로 지어진 것이다. 1529년 완공된 이프 성은 프랑스와 1세가 스페인과 터키로부터 마르세유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요새였다고 한다. 1591년, ‘이프 성’의 성주는 구교도 왕에게 충성하는 이였는데 당시 왕이었던 앙리 4세가 신교도이었던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앙리 4세의 부대가 이 섬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요새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의 투박하고 간단명료하며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막강한 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프 성 입구
이런 철옹성 같은 모습 때문이었을까? 이 성을 배경으로 1844년 알렉산더 뒤마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썼으며 소설 속의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Edmond Dantès)의 멘토였던 신부 아베 파리아(Abbe Faria)는 실제 이곳에 수감되었던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프 성’의 지하에는 ‘에드몽 단테스 방’이라고 명패를 단 방이 있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더구나 이 방에는 파리아가 갇혀 있었던 옆방으로 연결된 구멍이 실제로 남아 있어 관람하는 재미가 더 있다.
몬테크리스토의 방(좌)과 파리아 신부의 방으로 연결된 통로(우)
1층에는 ‘미라보의 방’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방이 있는데 ‘미라보’는 프랑스 대 혁명 초기에 유창한 연설로 대중을 선도하던 혁명가였지만 왕정에 매수당했다는 설도 있어 평가가 엇갈리는 정치가다.
파리 센 강에 있는 ‘미라보 다리’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이프 섬’에 실제로 1774년에 일 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라보 수감 기록
일설에 의하면 루이 14 세 때 실존했다는 철가면도 이곳에 투옥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입증된 것은 없다.
수감자 중 탈옥에 성공하거나 탈옥을 시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오직 소설 속의 ‘에드몽 단테스’ 만이 유일하게 성공한 사람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프 성의 감옥은 없는 자에게는 더 힘든 곳이었는데 가난한 범죄인들은 창문도 없는 지하 방에, 반면 여유가 되는 이들은 위층의 창문이 있는 방으로 배치를 받았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벽난로가 있는 방도 있었다고 하니 여기도 ‘유전 무죄, 무전 유죄’는 성립하는가 보다.
이프 성에는 또 하나 꼭 봐야 할 흥미로운 것이 있다.
독일의 천재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1515년에 만든 ‘코뿔소(Rhinoceros)’ 목판화다.
이프 성에 전시되어 있는 뒤러의 코뿔소 판화
도대체 독일의 천재 화가의 작품이 프랑스 최남단의 항구 앞바다의 조그만 섬에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사연은 이랬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는 나라 간에 자국의 특산물을 선물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인도산 코뿔소가 포르투갈의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는데.
1515년 5월, 인도를 떠나 120여 일의 긴 항해 끝에 코뿔소는 리스본 항구에 도착한다. 인도에서 공수되어온 최초의 동물인 코뿔소는 유럽에는 없는 동물이었다. 유럽인들은 코뿔소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코뿔소를 종종 유니콘과 혼돈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귀한 코뿔소가 왕이 가지고 있던 코끼리와 자꾸 충돌을 빚자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마누엘 1세(Manuel I)는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에게 말썽꾸러기 코뿔소를 다시 선물로 보낸다.
리스본에서 다시 로마로 보내지던 코뿔소는 마르세유 앞바다를 지날 때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프랑스와 1세의 청에 의해 잠시 ‘이프 섬’에 들리게 된다. 프랑스 왕은 이 전설의 동물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황청으로 향하던 배는 프랑스령인 ‘이프 섬’에 잠시 정박하게 되고, 실제로 코뿔소는 프랑스와 1세를 만나기 위해 배에서 내려져 섬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코뿔소는 교황청에 당도하기 직전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 배에서 사망했다니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장시간 항해로 혹사시킨 것이 안타깝다.
그런 인연으로 뒤러의 유명한 판화는 적막한 ‘이프 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뒤러는 이 목판화를 오로지 상상에 의해서만 만들었다고 한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코뿔소를 글로 묘사한 내용과 간단한 스케치만 보고 상상하여 만든 것이라니 세계적 천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닌 것은 확실하다.
비록 실제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 점이 있다지만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그 후 300 여 년간 뒤러의 작품은 많은 인기를 누리며 그의 작품을 모사한 작품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프 성’은 감옥 으로서의 역할을 19세기 말에 끝내고 1890년부터 대중에게 개방되고 있다. 무인도의 작은 섬이지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늘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마르세유와는 띠어 놓을 수 없는 섬이 되어 버렸다.
이프 성에서 바라본 마르세유의 노트르담 성당과 시내 전경
마르세유는 항구 도시인만큼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
해산물을 재료로 하는 프로방스 전통 음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야베스다. 마르세유가 바로 부야베스의 본 고장인데 일종의 생선 스튜(fish stew)라고 생각하면 된다. 항구도시이다 보니 배 사람들이 먹던 음식으로 시작됐던 부야베스가 이제는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부야베스가 일반 생선 수프와 구별되는 것은 프로방스 지방의 허브와 양념이 추가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해물탕과 비슷한 음식인데 많은 양을 끓이면 그만큼 여러 종류의 생선과 해산물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더 좋은 맛을 낼 수 있어서 10인분 이하의 부야베스는 잘 안 만든다고 한다.
미슐랭 가이드에 보면 진정한 부야베스를 만들려면 4가지 요소가 갖춰줘야 한다는데 첫째 지중해산 라스카스(Rascasse:전갈 물고기)가 들어가야 하고, 둘째 신선한 생선, 셋째 프로방스의 올리브 오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료 샤프론(Saffron)이 들어가야지만 제대로 만든 부야베스로 친다고 한다.
부야베스를 파는 많은 식당들 가운데 구 항구에 있는 식당 ‘미라마르(Miramar)’는 제대로 된 부야베스를 맛볼 수 있는 유명 식당으로 많은 셀럽들이 다녀간 곳이다. 큰 프라이팬에 담겨 나온 부야베스는 웨이터가 정성스레 전갈 물고기의 살을 발라 주어 먹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10인분 아니라도 주문은 가능하다.